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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실에서] 사소한 듯, 중요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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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실에서] 사소한 듯, 중요한 일

입력
2005.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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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길에 경복궁의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의식을 자주 구경한다. 2002년부터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개최해온 이 의식은 이미 경복궁의 주요 볼거리로 자리잡았다. 매년 3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궁을 개방하지 않은 화요일을 빼고 오전 10시에서 오후 3시 사이 세 번 열린다. 이 시간이 되면 국내외 관광객들이 몰려 전통의식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하다.

이 광경을 볼 때마다 영국 버킹검 궁의 근위병 교대식 광경이 떠오른다. 35분간 장엄하게 펼쳐지는 근위병 교대식은 런던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드문 볼거리를 제공함은 물론 영국이란 국가이미지를 강하게 각인 시킨다.

근위병 교대식을 보며 영국 사람들은 어른 아이 가림 없이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확인하고 외국인들은 대영제국의 영광이 의식 속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실감한다. 그만큼 역사적 고증에 충실하고 전통의식을 그대로 재현한다.

●아쉬운 경복궁 전통재현 의식

여기에 비하면 경복궁에서 펼쳐지는 의식은 초라하다. 페인트칠이 번들번들한 모자, 한눈에 모조품임이 드러나는 칼과 창, 값싼 재질의 의상에서부터 영화 촬영장의 엑스트라를 연상케 하는 수문군들의 모습 등. 여기서 관람객들이 5,000년 역사의 흔적이나 조선시대 문화의 자취를 찾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고 이 의식을 경복궁의 대표적 관광자원으로 정착시킨 문화재보호재단의 노고를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의상은 꾀죄죄하고 소품들도 조악하기 이를 데 없어 과연 이런 식의 전통의식 재현이 필요할까 싶었는데 정말 많이 개선되었다.

예산 부족, 공연요원을 계약직으로 써야 하는 문제 등 열악한 환경에서 인상 깊은 관광상품의 하나로 뿌리내리게 한 것은 인정할 만하다. 그래도 영국의 버킹검 궁이나 중국의 자금성을 구경한 사람들에게 이 의식이 어떻게 비쳐질까를 상상해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영국 근위병의 상징인 ‘키다리 모자’의 소재를 바꾸는 문제로 생긴 논란을 전한 외신이 기억 난다. 캐나다 불곰의 모피로 만드는 이 모자를 동물보호운동가들이 문제 삼으며 합성소재로 모자를 만들라고 촉구하자 영국군 병참 관계자들이 합성소재로는 천연소재의 특질을 유지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는 내용이다.

1768년부터 영국군이 착용해온 불곰 모피 모자는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격퇴한 프랑스군 모자의 디자인을 모방하면서 오늘의 ‘키다리모자’로 태어났다.

현재 약 4,000명의 영국군 근위보병이 2,000개의 모자를 돌려가며 착용하는데 제작비만 개당 1,300달러로 매년 100개정도만 새로 만든다고 한다. 30여년 전에도 이 모자를 합성소재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방수와 통풍, 보온, 발한, 형태 유지 등에서 천연소재를 따를 수 없어 실패했다.

“모자 재질을 합성소재로 대체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과제다. 또 전통을 지키는 것이 근위병의 사기에 매우 중요하며 영국군은 전통을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영국 국방부의 의복조달 책임자의 해명이다. 사소한 듯한 근위병 모자 소재 교체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 우리의 현실은 낯이 뜨거워질 지경이다.

●정쟁보다 가치있는 일 많아

안 하면 몰라도, 이왕 할 바에야 빛나게 해야 한다. 아무리 우리의 5,000년 문화가 어떻고 해봐야 구체적인 느낌으로 전해지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관광전략이라 할 수 없다.

서울의 대표적 명소인 경복궁 한 가운데서 조선왕조의 의식을 재현하는 효과는 금액으로 따질 수 없다. 외국 관광객들에게 우리의 뿌리깊은 문화와 전통을 체험케 하고 어린이 학생들에게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역사의식을 심어주는데 이보다 나은 것이 어디 있을까.

서울의 발전을 위해 세계 유수 기업의 CEO들로 구성된 서울국제경제자문단(SIBAC) 2005년 총회에서 “서울의 풍부한 예술 및 역사적 자산은 서울 정체성의 불가결한 요소”라고 한 크리스토퍼 포브스 포브스 부회장의 지적은 정곡을 찔렀다.

이런 일들이 공허하고 짜증나는 정치논쟁보다 사소하고 하찮은 일은 아닐 것이다. 정작 정부가 할 일은 바로 이런 일들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사소한 듯 보이나 중요한 분야가 어디 이것 뿐이랴.

방민준 논설위원실장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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