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시간은 끊임없이 순환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나의 운동이 재현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같은 시간이다”(‘자연학’)라고 했을 때 그 상식의 시간은 낮과 밤 혹은 별의 운행처럼 반복 영속하는 것이었다.
이후, 특정 시각 특정 사건의 의미가 말뚝처럼 붙박인 기독교의 세계, 중세의 시간은 굴절도 단속도 없는 선형으로 뉴턴에게로 이어져 진보와 진화의 정신사를 일궜다. 하지만 그 뉴턴의 시간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여지없이 휘어졌고, 이제 현대의 시간은 그 양상과 패턴의 규명을 현대물리학의 숙제로 던져두고 있다.
우리는 1초의 추상을 초침 이동이라는 허술한 구상으로 얼버무리며, 거기에 기대 탄생과 죽음을 규정하고 삶을 규명하며 희로애락 온냉건습의 감각을 설명한다. 우리가 삶을 모르는 것은 시간을 모르기 때문일지 모른다.
소설가 구효서씨의 소설집 ‘시계가 걸렸던 자리’를 읽을 때, 가령 “태양이 이동하는 짧은 순간순간마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걸까. 어마어마하겠지.
그 사실만으로도 순간은 영원과 같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 거겠지”(표제작)라거나, “(별빛을 보며) 별은 간데없고, 다만 그것이 남긴 찬란한 빛만이, 시간이라는 이름의 긴 띠로 우주공간을 가로지르고 있는 거였다”(‘밤이 지나다’)고 할 때, 혹은 “(상여를 뒤따르는) 그 무성하고 엄숙하게 연속되는 생명들”(‘소금 가마니’)을 말할 때, 우리는 “실연 뒤의 작은 깨달음의 느낌”처럼 절망의 순간에 “느닷없는 안락과 충일”에 휩싸이고, 무한한 공허를 “쓸쓸한 충만”(‘자유 시베리아’)이라 칭할 명분을 얻는다.
표제작은 불치병에 걸린 47살의 ‘나’가 생의 첫 시점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퇴락한 고향 집에 들르는 이야기다. 시계가 없던 시절, 어머니는 ‘나’를 “(9월의) 아침햇살이 막 뒤꼍 창호지문 문턱에 떨어지”던 즈음에 낳았다고 회고한다.
훗날 생긴 벽시계는 신주단지를 모셨던 시렁 자리에 걸렸고, 어른들의 생활을 시침에 맞춰 “나날이 신식으로 세련”돼간다. 시계를 걸었던 못이 세월처럼 풍화된 옛 집에서 ‘나’는 생이 시작된 시간을 확인한다.
“내 생애 총량은 이제 초 단위까지 계산이 가능하게 됐다.”(19쪽) 유년의 성근 기억들을 따라가던 ‘나’는 하지만, 이미 숨진 뒤의 ‘나’의 시신과 육탈하고 풍화하는 모습을, ‘나’와 집이 생겨나기 전의 먼 옛 시간 속 ‘비와 바람과 구름과 바위들’만의 풍경을 환영처럼 보게 된다.
생과 사의 시작인 탄생 시점을 알고자 한 ‘나’는 그 뒤엉킨 시간 속에 망연해진다. “과연 한 생명이 생일날 비로소 존재를 시작하는 것일까. 아니라면 탄생은 죽음의 시발점도 될 수 없는 것 아닐까.
삶과 죽음의 시발점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29쪽) 시계는 어디든 있고, “내가 눈을 감는 시각을 저 홀로 정확히” 그리고 “하릴없이” 가리키겠지만 말이다.
빛이나 바람, 거울 혹은 거울 같은 존재들로 매개되는, 소설 속 삶의 시간들은 고대의 상식 혹은 현대 물리학 개념 속의 그것에 닿아있다. 그들의 삶 역시 무한히 변전하는 시공간의 바람이나 별빛처럼 아득하고 허무하지만, 끝이라는 게 실상은 끝이 아니기에, 어쩌면 끝내 알 수 없는 것이기에 그 허무는 역설적으로 위안이다.
시국사건에 연루돼 사회주의의 나라로 도망쳐 낯선 땅을 전전하다 당도한 시베리아의 끝, 자작나무 숲이 전하는 무한한 공허의 충일감에 젖는 ‘자유 시베리아’의 화자, 거듭되는 불행과 고통에도 달관한 듯 살다 홀연히 눈 덮인 산 속에서 숨진 한 남자와 그 죽음 끝 자리를 되짚어가며 아득히 먼 과거의 시공간에 놓인 듯 평온함과 행복감을 느끼는 ‘달빛 아래 외로이’의 ‘나’…. 이들의 낯선 허무가 곧 작가가 말한 ‘쓸쓸한 충만’이고, 보이지는 않지만 나부낌으로 존재하는 바람 같은 것일 것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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