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오. 내 사랑 그대여! 아직도 못 다한 사랑의 말들로 터질 것 같은 이 가슴 억눌러야만 하오. 내 죽어도, 사랑에 취한 내 눈으로 허공에서 당신의 몸짓에 입맞추리다. 나의 모든 것, 내 사랑이여!”
직설적이고 달뜬 언어가 진지한 고백으로 통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 같으면 코미디나 신파로 치부될 터이지만, 당대인에게는 삶의 형식이었다. 절대왕정 시대 프랑스의 고전 희곡 두 편이 나란히 상연된다. 예술의 전당의 토월 정통연극시리즈 ‘시라노 드 베르쥬락’과 서울시극단의 제1회 명작 코미디 페스티벌 ‘서민 귀족’이다.
‘시라노 드 베르쥬락’ 초입의 대사는 연인 록산느 앞에서 시라노가 내뿜는 언어다. 그는 사랑을 얻지 못 해 안달복달하는 사람이 아니다. 크고 못 생긴 코 때문에 언제나 곁눈질의 대상이었던 그는 자신의 운명과 싸우는 인간이다.
시라노의 번민은 사랑의 고뇌를 능가하는 우주적 차원이다. 자결에 앞서 그는 외친다. “그는 철학자이며 과학자였고, 시인이요, 검객이며 음악가였다. 하늘 나라에서 온 여행자요, 사랑의 순교자였다. 시라노 드 베르쥬락, 그는 모든 것이었으며, 또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그의 열정을 재지할 수 없었다. 록산느 앞에서 그 같은 대사를 날린 뒤, 칼로 스스로를 찌른 뒤였으니. 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열정의 사나이 달타냥의 모델이기도 하다.
연출가 김철리씨가 보는 “시라노는 순수한 인간의 상징”이다. 1992년 이 작품으로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거머쥐었던 그는 이번 무대에도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극단 산울림의 ‘목화밭의 고독’에서 배우로 출연하면서 동시에 두 달 동안 힘겹게 이 무대의 연출 작업을 해왔다. “외모지상주의가 판치는 이 시대, 못 생겼지만 사회의 부조리와 억압에 대해 강렬한 분노를 가졌던 그가 근원적 고독과 싸워 나가는 모습은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줄 겁니다.”
타이틀 롤을 위해 시적 언어를 벼려 온 최규하, 매력적 록산느에 이안나 등 젊은 배우들을 러시아 연극학교 기찌스의 연출학 박사 오순한 씨가 연기지도자로 나서 조련한 무대다. 에드몽 로스탕 작. 11월 8~27일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화~금 오후 7시30분, 토 3시.7시30분, 일 3시. (02)580-1300
‘서민 귀족’은 17세기 프랑스 극장가를 풍미했던 몰리에르의 작품이다. 시라노의 비장미 대신, 당시의 신흥 계급이었던 상류 부르주아의 부박함이 무대에 그득하다. 귀족이 되기 위해 벌어지는 갖가지 소동, 속물성 등 원작 특유의 질펀한 분위기는 허규 등 우리 연극계의 대선배들에 의해 일찌감치 한국화되어온 터라 낯설지 않은 작품이다.
연출자 손정우 씨는 “애드립에 의존하는 대학로의 개그와는 격이 다른, ‘성격 희극’의 진수를 펼쳐 보이겠다”고 벼른다. 톡톡 튀는 발레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안은미 씨가 안무를 담당, 코메디아 델 아르테(코믹 발레극)라는 원작의 정신에 충실한 무대를 펼쳐 보이겠다는 다짐이다.
이창직 강지은 등 출연. 11월10~20일 게릴라소극장. 화~금 오후 7시30분, 토 4시.7시30분, 일 4시. (02)396-5005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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