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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상처받은 영혼' 보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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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상처받은 영혼' 보듬다

입력
2005.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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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후 충남 천안시 소년교도소. 전국에 2곳 뿐인 소년 수형자 수용시설이다. 교도관을 따라 3개의 문을 통과하니 높고, 하얗고, 네모 반듯한 폐쇄 공간이다. 하늘까지 낯설다. “악은 화를 낳고 선은 복을 낳는다”는 표어 아래 시멘트 길이 끝나는 곳에 ‘문화의 집’이 있다. 2층 강의실 문을 슬며시 열고 29명의 재소자들 틈에 끼어 앉았다.

‘별과 꿈 문학회(대표 정도상)’ 회원들이 ‘재소자를 위한 문학치료’ 프로그램에서 강의를 맡고 있었다. 이번 방문이 4번째다. 문인 회원 36명은 모두 감옥에 다녀온 이들이다. 시인 고은 신경림씨를 비롯, 소설가 공지영 황석영씨 등 대부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옥살이를 했다.

이날은 소설가 정도상씨와 송기원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인 김형수씨가 강사로 나왔다. 문학 강좌나 문학 교실이 아니라 문학 ‘치료’다. 정씨는 “상처 받은 영혼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옆에 있던 민족문학작가협회 김형수 사무총장도 거들었다. “그림치료, 음악치료처럼 예술이 정신을 치유하는 시대가 온 거죠.”

오후 3시. 정씨의 ‘자기 사랑하는 방법’ 강의가 끝나고 송 교수가 강단에 섰다. “나는 별이 4개야. 고향에 온 거 같네. 허허….” 근엄한 대학 교수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에 금세 긴장이 풀어졌다.

송 교수는 자신의 과거를 더듬으며 젊은이들을 다독였다. “가난한 어머니 아래 아버지 없이 자라왔습니다. ‘내 피는 더럽다’는 생각에 중학교 3학년 때 유서를 쓰고 자살도 기도했지요. 이런 콤플렉스는, 그러나 자라고 보니 어느새 내 힘이 되어 있었어요.”

17~23세의 재소자 29명이 모여 앉아 진지하게 강의를 듣는 풍경은 수의만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고등학교 문학수업이다. 김모(21)군은 “처음엔 ‘빵’에 다녀온 선생님들이라는 말에 놀라기도 했지만 자신이 겪은 아픔과 상처를 담담하고 솔직히 말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절도 죄로 복역 중인 박모(19)군은 “선생님들 말씀 중에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많았다”며 미소지었다.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는 질문에 여기저기서 “모모(미하엘 엔데)” “첫사랑(이순원)”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등의 책 제목이 쏟아졌다.

조금씩 변해가는 재소자들 모습이 흐뭇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12주로 짜여진 프로그램에서 재소자들과 마음을 터 놓고 얘기할 수 있기까지 최소 7, 8주가 걸린다는 게 정씨의 설명이다. 시간문제 외에도 교정시설 당국과의 의사 소통도 넘어야 할 산이다.

정씨는 “문학 속 다양한 인생을 얘기하다 보면 가끔 ‘불온한’ 얘기도 하게 되는데 교도관에 따라서는 가끔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좀 더 자유로운 내용의 강의를 진행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게 문학회 측의 바람이다.

“이제 글을 써 봐야지. 주제는 두 가지. 세상에서 가장 슬펐던 순간, 아니면 가장 보고싶은 사람.” 정씨의 제의에 학생들은 대뜸 “어우~ 머리 아파요”라며 뻗댄다. 하지만 몇몇은 자세를 가다듬고 구상에 몰입했다. “여러분은 세상과 맞짱을 떴다가 졌습니다. 그 후 재미없는 삶이 시작됐죠. 하지만 기억하세요. 순간의 패배에 집착하면 삶은 거기서 초라해집니다.” 정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재소자들의 모습은 조금씩 푸른 수의를 벗어가고 있는 듯 했다.

천안=박원기기자 o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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