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차기의장으로 지명된 벤 버냉키(Ben S. Bernanke)는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아니다. ‘버난케’로 읽어야 할지 ‘버냉키’로 읽어야 할지조차 헷갈렸을 만큼 우리에겐 생소했지만, 월가는 이미 그를 그린스펀의 후계자로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버냉키를 FRB의장에 지명한 것은 부시 대통령이지만, 사실 절반은 ‘시장’이 임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월가에선 1년여 전부터 ‘포스트 그린스펀 시대’를 이끌어 갈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거명되기 시작했고, 경제학자 애널리스트 언론으로부터 평가가 계속되는 가운데 후보군은 점차 압축되어갔다.
당초 다수의 후보 가운데 한 명에 불과했던 버냉키 역시 이 과정을 통해 유력후보로 부상했고, 올 여름부터는 각종 시장전문가 설문조사에서 ‘그린스펀을 뒤이을 가장 적합한 인물’ ‘월가가 가장 선호하는 인물’로 자리를 굳히게 됐다. 여러 정치적 고려도 있었겠지만, 이쯤 되면 버냉키의 지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힘은 ‘시장’이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년 3월말이면 우리나라도 박 승 한국은행 총재의 임기가 끝난다. 후임을 놓고 벌써 ‘A씨가 열심히 뛴다더라’ ‘B씨가 가장 근접한 것 같다’는 식의 얘기가 나돌지만 시장검증은 백지상태다. 물론 검증할 만한 알맹이도, 월가만큼 검증능력을 갖춘 시장 역량도 안 되어 있는 탓이겠으나 그래도 이 과정을 생략하기엔 이제 한은 총재의 역할이 너무도 무거워졌다.
시장과 호흡하는 중앙은행 총재는 재산·병역·도덕성 검증만으로 맡길 자리가 아니다. 시장검증은 1~2주만에 끝날 수도 없다. 제대로 시장 테스트를 받으려면 더 늦기 전에 후보공론화를 시작해야 한다.
이성철 경제부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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