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극복하는 데는 지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지적 탐구는 무엇보다 현실의 딜레마적 상황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한 개인의 양심 차원을 넘어 사회와 국가의 정체성을 논란하는 데 이르면 더욱 그렇다.
강정구 교수 사건을 둘러싼 분란 속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는 보수든 진보든 흔히 스스로 처한 근원적 딜레마를 애써 외면하는 데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근원적 딜레마 무시한 분란
강 교수가 낡은 수정주의적 주장을 대단한 이론처럼 떠든 것부터 이런 딜레마를 무시한 것이다. 분단과 전쟁은 모두 동서 냉전의 산물이고, 우리의 국가적 기초와 존립도 거기에 의존했다.
이런 역사적 맥락과 국가의 정체성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이 북한의 통일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진작 통일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너그럽게 보아 유치한 딜레탕티즘, 지적 도락이다. 나쁘게 보자면, 사회가 딜레마적 생존 환경에서 합의한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모반이다.
정체성을 논하지 않더라도, 맥아더를 전쟁광 이라고 욕하는 것과 같은 주장은 학자의 본분과 거리 멀다. 전쟁의 역사 정치 전략적 배경을 천착하기보다 개인의 선악을 부각시키는 것은 이라크의 후세인이나 부시 미 대통령을 악인으로 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박하다. 학문적 엄밀함이 없는 주장을 공영방송이 앞장서 대접하는 현실이 분란을 부추겼다.
그러나 강 교수 처벌 문제를 다투는 주장들도 현실의 딜레마를 잊은 듯 강파르기만 하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민주사회가 소중하게 지켜야 할 헌법적 이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헌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법적 규제가 따르는 것은 분명하다. 그 경계를 가르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특히 남북대치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와 이를 규제하는 국가보안법의 관계는 헌법학자들에게도 딜레마로 남아있다. 찬반 주장 모두 이를 고민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보수여론이 형사처벌과 인신구속까지 촉구하는 것은 지나치다. 사회적 비난을 넘는 법적 제재와 구체적 수준은 수사기관과 사법부가 고민할 몫으로 남겨두는 절제와 아량이 아쉽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현실을 지탱하는 법과 제도의 권위를 위해서도 그런 절제가 필요하다.
이에 비해 처벌 반대론은 헌법과 정의의 이상에 충실한 듯 보인다. 그러나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 가치인양 주장하거나, 학자의 주장은 오로지 학문적으로 시비해야 한다는 논리는 헌법 현실에 비춰 적실하지 않다. 국가보안법이 합헌적 법률로 살아있고, 학자 아닌 일반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일 수 없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빗나간 다툼 속에서 누구보다 근원적 딜레마에 신경 쓰고 갈등 완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 현실과 이상을 함께 돌보도록 여론을 설득하고, 헌법적 이상과 국가의 정체성이 걸린 다툼은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자고 말하는 것이 헌법 정신과 헌법적 절차에 충실한 자세다.
그런데 이 정부는 거꾸로 스스로 헌법적 이상과 정의와 시대정신을 구현하겠다고 나섰다. 그게 사회 전체를 소모적 논쟁 깊숙이 몰고 가고, 딜레마 극복을 한층 어렵게 만든다고 본다.
●역사와 현실과 제도 존중해야
이렇게라도 국가적 딜레마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정부는 강 교수와 마찬가지로 지적 상상력은 있는지 모르나, 사회와 국가가 안고 있는 딜레마의 역사 정치 전략적 뿌리와 연혁은 무시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마저 대외적으로는 일관되지 못한 기회주의적 면모를 보이다가 도덕적 지지가 소진되는 듯 하면, 안으로 이념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데 열중한다. 역사와 현실과 제도를 토대 삼지 않는 정체성 추구는 정권의 딜레마조차 해결하지 못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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