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퇴임한 어느 대법관의 퇴임사에는 “정작 사법부에 대한 비판은 외면한 채 사법권 독립의 명분으로 사법부의 집단 이익을 꾀하려는 것으로 비쳐질 우려가 있는 움직임에 그냥 동조하고 싶어 했다”는 구절이 보였다.
다른 한 분의 대법관은 사법권 독립에 대한 위협이 상존함을 지적하면서 “권력에 영합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며 소신을 피력했다”라는 퇴임사를 내놓았다. 이 두 글은 독자들에게 각각의 속내가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사법권 독립이란 말은 법원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그 기대의 좌절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사법부의 구성과 역할에 관한 논의에서 사법권 독립은 늘 제1의 명제로 떠오르고 지고의 가치로 전제된다. 그러나 사법권 독립은 기실 가치중립적인 개념이며, 양날의 칼이다.
역사적으로 사법권 독립은 정치권력의 압제에 대한 법률가의 항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출발에서부터 일종의 저항적 개념이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사법권 독립이 그 자체로 선이라고 믿는 일종의 착시현상을 낳아 왔다.
그러나 사법권을 독립시키는 것은, 독립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독립한 사법권이 해야 할 무엇인가를 위한 것이다. 독립한 사법권이 그 독립의 방호벽 뒤에서 혹시라도 나쁜 사법작용을 펼친다면, 세상에 그처럼 딱한 일도 없을 것이다.
딱하다 못해 재앙이 되어 버린 경우도 있다. 독립한 미국 연방대법원은 1954년 브라운 사건에서 공립학교에서의 흑백 분리는 위헌이라고 판결하여 흑백 통합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연방대법원은 1857년의 드레드 스콧 사건에서 흑인 노예는 법원에 제소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고 판결함으로써 같은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법적 보호의 바깥으로 팽개쳤고, 그로부터 4년 후 미국은 남북전쟁이라는 참혹한 내란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사법부의 재판에 대하여는 상소라는 장치 외에 시정할 방책이 없다. 상소라는 제도 밖에서 사법부의 재판을 시정하려는 노력은 자칫 사법권 독립에 대한 침해라는 딱지를 얻기 십상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사법권의 행사가 잘못될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는 사법부 자체에 있을 수밖에 없다.
사법작용도 결국은 사람 살아가는 일의 일부분이다. 사법제도는 사회 내의 여러 가치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시스템 중의 하나이고, 사법부 역시 그 가치 분배체계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입법자의 의사, 정책 집행자의 목표, 언론이 형성하고 전달하는 여론, 각종 이익집단의 목소리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더라도 보고 듣지 않을 수는 없다. 견제와 균형은 헌법의 통치원리일뿐만 아니라 사회라는 역동체의 존재방식이다.
사법부 혼자만이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사법권 독립이란, 남이 시키는 대로 판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판결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법권 독립은 도구적, 방법적 개념일 뿐이다. 그 개념의 무내용성을 채우는 것은 법관의 사법 철학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사람들을 향해 열린 자세만이 사법권 독립의 가치중립성이 가지는 위험에 대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사법권은 독립하여야 한다. 그러나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홀로 서되 사람들을 향해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넓게 열어야 한다. 그런 사법부만이 우리 법 공동체의 참다운 자랑거리라는 자리를 지켜갈 수 있을 것이다.
정인진 법무법인 바른법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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