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남편이 사귄 남자가 있었냐고 묻길래 짧은 기간 만난 사람이 있었다고 대답했더니, 그 때부터 육체 관계를 추궁하면서 구타를 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아이조차 우리 자식이 아니라고 부정하더니 싸움만 나면 절 나면 때립니다. 이제 정말 못 견디겠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남편을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제 얼굴에 침뱉기 같아 혼자 끙끙 앓고 있습니다.” 결혼 10년차 주부 김모(33)씨
“차 타고 어디 가는 길에 말다툼이 났는데 원래 남편이 손버릇이 안 좋아요. 그날도 어김없이 머리를 치고 몸을 밀치더라고요. 참다 못해 가까운 경찰서로 갔더니 ‘가정 일로 무슨 경찰서까지 왔냐. 아이 아빠 콩밥 먹이게 하기 싫으면 조용히 둘이 해결하라’고 되려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았습니다. 참 서럽고 어이가 없어서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결혼 18년차 주부 윤모(45)씨
“어느날 집에 있는 데 남녀가 끊임없이 욕설을 퍼붓고 싸우는 듯 시끄럽더니 급기야 유리깨지는 소리가 나고 여자 비명소리가 나더라고요. 꾀 오랜 시간 계속되길래 큰 사고가 날것같아 112에 신고를 한적이 있어요. 그런데 ‘왜 남의 일까지 신경을 쓰고 그러냐’는 짜증 섞인 대답이 돌아오더군요.” 미혼 직장인 조모(29)씨
서울시가 운영하는 여성 긴급 전화 ‘1366’에 따르면 올 상반기 상담 10,958건 가운데 4,304건, 전체의 39%가 가정 폭력 상담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 여성 가족부에서 실시한 전국 가정 폭력 실태 조사 결과는 배우자의 폭력을 경험한 여성의 63.8%가 우울증 증세를 보였으며 부부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도 60.9%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가정에서 발생하는 부부 폭력은 아동 학대, 자녀들의 탈선 행위, 가출 등으로 이어져 결국 가정 파탄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가정 폭력이 위험 수위에 달한 것이다. 아직도 매맞는 여성들을 보면서 ‘맞을 짓을 했겠지, 여자 성질이 보통이 아닌가 보네’라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일부 경찰들까지도 가정 폭력 발생 신고를 받으면 ‘소란하니 너무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등 형식적인 주의만 주고 돌아가기 일쑤였다.
가정 폭력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유력하다. 가정내 가부장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어 부부간의 실제적 평등이 이뤄지지 않는 점, 가정 폭력 특례법의 실효성을 저하시키는 요인 등이 그것이다.
가정 폭력을 예방하고 그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서는 경찰의 역할이 중요함에도 불구, 가정 폭력 현장에서 경찰이 적절하고 긴급하게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미흡하다는 점은 현실적 요인이다.
실제로 일선 경찰의 현실적 원칙은 무개입주의라는 관행. 가정 폭력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무마시키는 선에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들과 아이들은 신고도 못하고 가정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던 데는 이 같은 사정이 있다.
또 폭력을 일삼는 남편들에 대한 기소율도 3%에 지나지 않는다. 기소율이 낮은 것은 가정 폭력 사범으로 접수돼도 ‘가장은 가정의 기둥’이라는 이유로 아내가 고소를 취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려워 가장의 처벌을 원치 않는 것도 까닭이었다. 가부장적인 사고 방식과 현실적인 생계 문제까지 겹쳐 남편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치고 있는 현실이다.
곽배희 한국가정법률 상담 소장은 “팔자려니 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가정내 문제이기 때문에 남이 이래라 저래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태도는 잘못된 생각“이라며 “단순한 부부 싸움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에게 치명적인 신체적 손상과 정신적 황폐화를 야기하고 나아가 가족 해체의 근본적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간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곽 소장은 “가정 폭력은 범죄라는 인식 아래 이웃의 가정 폭력까지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신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정폭력 대처법
▦폭력을 당할 때는 일단 현장을 피해라. 믿을 만한 친구나 친지 이웃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다.
▦폭행을 당한 흔적은 사진으로 증거를 남긴다. 목격자가 있을 경우 증인을 확보해 둔다.
▦국번 없이 112에 신고한다. 본인이 신고하기 어려울 경우 믿을 만한 이웃집에 대신 신고해 줄 수 있도록 평소에 신호를 만들어 둔다.
▦24시간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정 폭력 상담소(국번 없이 1366)에 전화해도 긴급한 경우 경찰과 연결시켜 주며 전문 상담 기관과 긴급 피난처를 알선한다. 무료 법률 상담, 진단서 발급과 치료, 쉼터 무료 이용 등의 편의를 제공한다.
▦한국 가정법률상담소(02-780-5688~9)에도 신고 및 상담을 할 수 있다.
가정폭력방지법이란?
1998년 7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가정 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가정 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이 법은 가정 폭력 범죄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누구나 신고할 수 있다는 것, 신고한 사람에 대해 신고 행위를 이유로 불이익을 줄 수 없다는 것, 신고 받은 경찰은 즉시 출동해야 하고 진단서가 없어도 현장에서 가해자를 연행할 수 있다는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조윤정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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