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에서 시작한 단풍(丹楓)이 백두대간 등줄기를 따라 남하하고 있다. 질주하듯, 숨을 고르듯, 바람을 타고 이 산 저 산 옮겨 붙는 산불이라도 되는 듯, 이 단풍(丹風)에 온 강토가 불바다다.
과학의 눈은 단풍 현상을 가리켜 ‘날이 추워지면서 푸른 잎사귀를 가득 메운 엽록소가 줄어들고, 붉거나 노란 색깔을 머금은 카로틴, 크산토필이 두드러지는 현상’이라고 덤덤히 설명한다. 하지만 그로 인한 색채의 향연으로 속세는 차원을 바꾼다. 절정에 다른 단풍에 시흥은 도도해진다. 무릉도원이나 거기 견줄까.
상상 속의 무릉(武陵)을 지명으로 사용하는 곳이 의외로 많이 있다. 강원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경북 안동시 남후면 무릉리, 충북 괴산군 청산면 무릉리, 남제주군 대정읍 무릉리 등 행정구역만도 여럿 되며, 강원 동해의 무릉계와 충남 금산의 무릉리 계곡 등은 골짜기 이름에 무릉이 붙어있다.
이 중 최고의 절경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동해의 무릉계가 아닐까 싶다. 백두대간 자락인 두타산과 청옥산이 품은 계곡이다. 그 곳은 단풍은 깃발처럼 장엄하다.
강원도로 향하는 영동고속도로는 평일인데도 행락객으로 만원이다. 기나긴 행렬은 남도 두륜산 발꿈치를 물들일 때 까지 멈출 줄 모른다.
영동고속도로에서 지난 해 확장된 동해고속도로로 갈아 타고 동해에 도착, 무릉계 입구에 들었다. 매표소를 지나면서 등산은 시작된다. 입구에 자리한 약수의 물줄기가 세차다. 변강쇠 약수, 야릇한 호기심이 동한다. 약수터 옆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를 지나면 이내 무릉반석이다. 자연이 다듬은 암반 하나가 바닥에 드러 누웠다. 바닥 면적만 1,500평.
산이 있고 계곡이 있는데 묵객들이 이 곳을 그냥 놔뒀을 리 없다. 술 한잔 걸치고 휘어 갈겼을 듯한 글씨가 바위를 빼곡히 덮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로 이름난 조선 초기 문장가 양사언도 가세했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台泉石 頭陀洞天)’이라는 글씨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신선이 노닐던 무릉, 너른 암반에 샘이 솟는 바위, 번뇌를 떨쳐내는 골짜기’라고 새겨진다. 이 일대가 무릉이라는 이름을 얻게 한 공신이다. 아직은 푸른 기운이 짙지만 곳곳에서 초록을 떨어낸 단풍이 눈에 띈다.
반석을 뒤로 하고 통일신라 당시 범일국사가 창건했다는 삼화사를 지나니 참나무 군락지다. 자세히 보면 주변에 나무를 베어 숯을 구워내던 가마터 흔적이 드러난다.
학이 날아와 놀았다는 학소대와 옥처럼 맑은 물이 흐른다는 옥류동은 그 이름부터 신선의 세계 아닌가. 맑디맑은 선녀탕에서 바라보는 장군바위는 영락없이 잘 생긴 남자의 얼굴이다. 조금씩 짙어가는 단풍으로 홍조를 띤다.
조금 더 가면 갈림길이다. 오른쪽으로는 하늘문, 왼쪽으로는 쌍폭포와 용추폭포. 우선 왼쪽을 택한다. 몇 분이 지났을까. 무릉계 최고의 비경이라는 쌍폭포다. 층층으로 난 바위 계단을 흘러내리는 실비단 폭포수가 두 갈래로 떨어진다. 마치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찍어낸 듯 꼭 닮은 쌍둥이 폭포이다.
폭포 주위를 물들이는 단풍이 가세하니, 선계에 잠시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여기서 다시 3분을 오르면 용추폭포. 3단으로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은 영락없는 용의 승천 장면이다.
여기서 잠시 산행은 끝난다. 다시 쌍폭포까지 내려온 뒤 아까 남겨둔 오른쪽 길을 택한다. 문간재에서 신선봉으로 오른다. 신선봉에 오르니 멀리 두타산에 불이 붙었다. 머잖아 그 산불은 온 산을 태우리라. 문간재에서 사원터로 가는 길은 단풍의 세상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코스.
계곡을 따라 너럭바위가 끊일 듯 이어지고, 계곡옆 절벽에 비스듬히 매달린 나무 잎사귀들이 붉은 물을 토해내니, 계곡물까지 붉은 비단길이다.
이제 서서히 하산할 때. 문간재에서 하늘문으로 향한다. 피마름골에서 보는 하늘문은 아찔한 현기증이 날 정도로 경사가 가파르다. 90도에 가까운 수직 절벽에 놓인 다리를 오른다.
혹 떨어질 새라 양 손은 난간을 부여잡다가, 굳어가는 다리를 두드려대며 300개가 넘는 계단을 오른다. 얼마를 올랐을까. 잠시 뒤를 돌아다보니 정말 천상에 오른 느낌이다. 여기가 어디인가.
바로 신선의 세상 무릉계이다.
■ 여행수첩/ 무릉계곡
동해고속도로 종점인 동해IC에서 나와 동해 시내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삼척 방면으로 가다 보면 효가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 삼화동 사거리에서 좌회전한 뒤 5.5㎞가량을 가면 무릉계 입구와 만난다. 주차비 2,000원, 입장료 1,500원. 무릉계곡 관리사무소 (033)534-7306
행락객이 몰리는 주말에는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편이 낫다. 단풍 열차편도 있다. 오후 11시 15분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 동해 추암역에 이튿날 오전 5시 40분 도착한 뒤 추암 해돋이와 두타산 무릉계곡, 묵호항, 천곡동굴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돌아오는 일정은 오후 3시25분 동해역을 출발, 오후 9시26분에 청량리역에 도착한다. 야간 이동에서 오는 관광객들의 불편을 고려, 새마을호를 이용하게 된다.
단풍 등산 코스는 관리사무소앞에서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 두타산성 입구 - 두타산성을 왕복하는 길. 2시간 가량 걸린다. 21, 22, 28, 29일 출발. 동해시는 단풍 열차 관광객을 위해 학소대에서 건강 학춤 공연, 학춤 다이어트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성인 6만5,000원, 어린이 6만원. 지구투어 (02)3391-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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