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에드윈 포터 감독의 ‘대열차 강도’를 시작으로 서부영화는 한때 할리우드를 먹여 살린 돈줄이었다. 법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권선징악의 명료한 이야기 구조가 영화 팬을 매료시키면서 숱한 명작과 스타들을 양산해 냈다. 그러나 서부영화의 장르 관습을 이어받은 SF영화가 번창하면서 서부영화는 쇠퇴 일로의 길을 걸었다.
이제는 골동품이 되어버린 서부영화의 부활을 알리는 두 영화가 나란히 관객을 만난다. 디지털로 포장한 영화의 홍수 속에서 모처럼 아날로그의 투박한 질감과 옛 추억을 느낄 수 있는 기회다.
▲ 정통 서부영화의 적자 '오픈 레인지'
‘오픈 레인지’는 정통 서부영화의 장르적 유산을 우직하게 이어받는다. 선과 악은 극단적으로 갈려 대립하고, 정의는 예정된 수순처럼 구현된다.
소 방목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카우보이 찰리(케빈 코스트너)와 보스(로버트 듀발)가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며 한 마을을 쥐락펴락하는 악당 벡스터와 맞서는 과정은 지극히 전형적이다.
찰리가 운명처럼 현명한 여인 수(아네트 베닝)와 맞닥뜨리며 수줍은 사랑을 나누고, 악당의 폭압에 숨죽이며 살던 마을 사람들이 주인공들의 분투를 보고 분연히 일어서는 것도 정통 서부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장면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을 배경으로 한 목가적인 삶이 초반부를 장식하는 것이 그나마 다르다면 다른 점. 모범생처럼 장르의 규칙을 복기해가는 ‘오픈 레인지’의 매력은 배우들의 호연과 과거에 대한 향수다.
고르지 못한 호흡 사이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가는 로버트 듀발과, 무뚝뚝한 표정에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는 케빈 코스트너의 연기는 연륜의 무게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먼지가 휘날리는 황량한 서부 마을의 전경과 떠들썩한 술집, 손바닥을 이용해 권총의 노리쇠를 후퇴 전진시키는 총잡이들의 모습은 잠들어 있던 추억을 깨운다.
‘늑대와 춤을’(1990)과 ‘와이어트 어프’(1994)를 통해 서부영화에 대한 끈끈한 애정을 드러낸 케빈 코스트너가 ‘킬 빌’ 출연을 거부하고 제작비(2,600만 달러) 절반을 대며 감독까지 했다. 27일 개봉. 15세.
▲ 무규칙 잡종 서부영화 '황야의 마니투'
1970년대 충무로에는 코미디언 구봉서가 주연한 한국형 서부영화 ‘당나귀 무법자’가 있었다. 서부영화가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자 우리의 정서에 맞게 말 대신 당나귀를, 시거 대신 곰방대를, 양주 대신 막걸리를 마시는 식으로 바꿔 이야기를 풀어냈다. 굳이 비교하자면 독일에서 만들어진 ‘황야의 마니투’는 ‘당나귀 무법자’에 가까운 무규칙 잡종 서부영화다.
검은 옷을 입은 악당이 음모를 꾸며 선한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린다는 영화의 개요는 서부영화의 관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황야의 마니투’는 서부영화의 몸을 빌릴 뿐, 장르의 틀을 벗어나 자유자재로 펼쳐지는 상상의 날개와 패러디로 관객의 웃음보를 자극한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토끼 부족에게 붙잡힌 아파치족 아바하치와 백인 총잡이 레인저가 황급히 도망치다가 속도 위반에 걸려 음주 측정을 당한다거나, “월마트에서 산 도끼는 보증기간이 지난 뒤 깨졌다”는 식의 대사를 사용하면서 영화는 현대와 서부시대를 가르는 시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구린 도마뱀’ ‘웃기는 토끼’ ‘미친 젖소’ 등의 이름을 가진 인물들을 등장시켜 ‘늑대와 춤을’을 패러디하며, ‘인디애나 존스’의 보물찾기 모험담을 비틀기도 한다.
럭비 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를 극 전개와 유머가 매력. 2001년 독일에서만 1,200만 명을 동원하며 많은 화제를 뿌렸다. 아바하치와 쌍둥이 동생 위니터치를 동시에 연기하는 독일의 ‘국민 코미디언’ 미카엘 헤르비그가 감독 각본 제작까지 담당하며 1인 5역을 해냈다. 28일 개봉. 12세.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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