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인천공항을 통해 10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오는 북관대첩비. 1905년 러ㆍ일 전쟁 당시 일본군 미요시 중장이 강탈해간 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의 한 귀퉁이에 방치되어 있던 이 비석의 반환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매달린 이유는 무엇인가? 또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한일 관계가 다시 한번 얼어붙고 있는 이즈음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KBS 1TV ‘HD 역사스페셜’이 21일 긴급 편성한 ‘100년만의 귀환, 북관대첩비’ 편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이를 위해 제작진은 북관대첩비의 주인공인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함북 길주에서 3,000명 밖에 되지 않는 의병을 이끌고 2만2,000에 달하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전략에 대해서 알아본다.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 출병을 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으뜸가는 맹장으로 최신 병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강력한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이런 가토 기요마사와 맞서 정문부 장군은 6전 전승이라는 신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영웅의 뒤안길은 처참했다. 정6품 낮은 관직의 문관으로 임란이 일어나자 자청해 북평사의 소임을 맡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운 그는 살아 생전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를 시기한 관찰사 윤탁연의 축소 보고 탓이었다. 그리고 60세가 되던 나이에 역모 사건에 휘말려 혹독한 고문을 받다 숨진다. 그 뒤 그의 명예가 회복되고 북관대첩비가 세워지기까지 꼬박 100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HD 역사스페셜’ 제작진은 아울러 항왜의 기상이 서린 북관대첩비가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게 된 까닭도 추적해 본다. 반환을 앞두고 10월 12일 5년 만에 일반에 공개된 북관대첩비는 비신이 커다란 자연석에 눌려 있는 상태였다.
아울러 1978년 한국사 연구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북관대첩비를 발견한 이후 27년간 계속되어온 반환 운동의 성과와 의미에 대해서도 짚어 본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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