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개월 동안의 비틀스 동행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씌어진 헌터 데이비스의 ‘비틀스’(이형주 옮김, 베텔스만코리아 발행)는 비틀스를 가장 근거리에서 관찰한 평전이라 할 수 있다.
30여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여러 종의 비틀스 관련 책들이 출간됐지만, 진짜 비틀스의 속내를 제대로 들여다본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 곳곳에 비틀스 신화의 진실과 이면이 담겨있는데,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사이의 알력과 애증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위해서든,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시대의 트렌드를 형성했던 비틀스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든 비틀스에 관심 있다면 숙독해 볼 만한 책이다.
지금은 50대가 넘은 비틀스 당대의 팬들조차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비틀스를 제대로 알게 됐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비틀스는 그 책의 내용과는 크게 상관 없다고 할 수 있다.
객관적 사료와는 무관한 내용을 가지고 비틀스에 대해 얘기한다는 건 기왕에 알려진 것들을 견강부회하거나, 최소한 왜곡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래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 부지불식 재생되는 특화된 감각을 조장하고 가동케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특정한 시기의 한 기억을 반복되는 체험으로 재점화시키는 기능을 노래가 가지고 있다고 했을 때, 그 경험은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고도 절대적인 원형체험이 된다.
그 순간, 세상은 한 노래가 최초로 각인되었던 때의 심리적 상태와 감각적 밀도를 빠르게 환기시키며 그 노래의 시점으로 해석되고 받아들여진다. 내게 비틀스는 그런 의미다.
때문에 내 감각이나 기억 속에 새겨진 비틀스는 헌터 데이비스의 평전과는 전혀 다른 비틀스일 수밖에 없다. 이 글은 바로 그렇듯 유일무이한 비틀스, 더 정확히 말해 존 레논에 대한 나의 편애를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끝날 것이다.
끝없는 비가 종이컵에 쏟아지듯 말들은 날아오고 있다
주르르 미끄러지며 빠져 나와 우주를 지난다
슬픔의 바다, 기쁨의 파도들이 나의 머리 위를 떠다니며
나를 홀리고 애무하고 있다
Jai Guru De Va Om(나는 나의 스승께 감사드린다)
- 비틀즈, ‘Across the Universe’ 1절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 ‘Let It Be’에 수록된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무렵, 난생 처음 가출을 했었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슨 밴드의 어떤 노래를 듣고 자살을 했다는 미국 청소년들처럼 노래가 등을 떠밀어 집을 나섰던 것도 아니다. 갑자기 꼭지가 도는 일이 생겨 홧김에 뛰쳐나왔을 뿐인데, 이리저리 떠돌며 입에 달고 다녔던 노래가 이 노래였을 뿐이다.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라는 후렴구만 제대로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엔 그것만으로 족했다. 지구가 자기를 중심으로 도는 줄로만 알던 외곬 소년에게 ‘아무 것도 내 상을 못 바꾼다’는 한 마디 말고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정말 내가 우주를 가로지르며 천지 사방에 시를 뿌리고 다니는 듯한 착각 때문에 최초의 가출은 행복했던 가출로 기억된다. 그 때 나의 길을 이끌었던 스승은 존 레논이었다. Jai Guru De Va.
헤비메탈 및 하드록 중독에서 막 빠져나와 이리저리 다른 사운드들을 기웃거리던 그 무렵, 내게 비틀스는 그저 고유 명사 비틀스였다. 그건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한 편도 읽지 않았음에도 셰익스피어를 잘 알고 있는 듯 여겨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던 내가 ‘Across the Universe’를 들은 건 친척집에 들렀다가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Let It Be’(1970)부틀렛 음반을 발견했을 때였다.
비틀스의 여느 앨범이 다 그렇듯 어느 한 곡 빠지지 않고 다 좋기만 했지만(악취미인지 모르지만, 내 경우엔 오히려 그래서 잘 안 듣게 된다), 세 번째로 수록된 ‘Across the Universe’는 종일토록 들어도 지겹지가 않았다.
60분짜리 공테이프 하나를 그 노래로만 메웠을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그 후로 얼마 동안 난 그 노래를 입에 달고 나만의 우주 속을 배회했다. 그 노래에서 존 레논은 그 어떤 노래보다도 솔직하고 명약관화한 자신의 초상을 그리고 있었다.
비틀스 정사(正史)에 의하면 ‘Let It Be’를 마지막으로 비틀스는 해체됐다. 존과 폴의 대립을 비롯한 여러 갈등이 혼재했던 비틀스는 ‘Revolver’(1966)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1967)라는 역작을 발표한 이후 균열의 조짐을 보이면서 중구난방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White Album’(1968)부터 응집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소의 의견차는 있지만, 이건 비틀스에 관한 여러 사료들이 입증하는 얘기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위에 든 것과 같은 ‘역작’들은 듣기가 편하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로저 워터스가 집권(?)하던 무렵보다 시드 배릿이 제멋대로의 실험을 감행했던 초기 시절의 핑크 플로이드 사운드가 더 끌리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磯? 자가 진단을 하자면 아마도 ‘구조적 완벽성에 대한 과도한 콤플렉스 및 일탈 욕구’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내 멋대로 붙여본 병명이다.
여하간 그런 특이한 병(?)에 시달리던 나는 나중에 비틀스의 앨범들을 이리저리 구해 듣다가 ‘Let It Be’와 ‘White Album’만 돈 주고 샀다. 그 중에서 ‘Across the Universe’와 ‘White Album’에 실려 있는 ‘Happiness is a Warm Gun’은 비틀스 노래 중에서뿐만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노래 톱 파이브에 랭크된 곡들이다.
두 곡의 공통점은 비틀스의 노래 중에서 존 레논의 냄새가 가장 농후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 노래들은 앨범의 전체 분위기에서 외따로 떨어져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앨범을 처음부터 재생시켜 듣다 보면 이 노래들이 나오는 부분만 궤도에서 이탈한 별처럼 저 홀로 공전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게 딱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이기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여럿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중 한 명의 시선이 다른 사람과는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거나 다들 웃고 있는데 혼자 우울해 보일 경우 그 사람의 캐릭터가 독자적인 것으로 보일 때가 있다. 때문에 사진에서 그 사람의 얼굴을 지우거나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을 지워버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Across the Universe’와 ‘Happiness Is A Warm Gun’에서 본 존 레논의 초상은 바로 그런 것이다. ‘Across The Universe’에서의 존 레논이 비틀스라는 잠수함에서 홀로 부양해 우주를 날아다닌다면 ‘Happiness Is A Warm Gun’에서는 거울로 둘러싸인 방안에서 외롭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가 떠오른다. 그 아이에 대한 느낌을 단순무식하게 말하자면, ‘자발적 왕따’에 가깝다.
‘Happiness Is A Warm Gun’은 비틀즈 노래치고는 비교적 음울한 곡이다. 따라 부르기도 쉽지 않고, 가사도 에곤 쉴레 풍의 그로테스크한 자화상이 연상될 정도로 자멸적으로 뒤틀려 있다.
그런데 그 자멸은 자기애의 또 다른 극단으로 여겨진다. 가사를 살펴보면 ‘이상한 나라의 오이디푸스(?)’같은 느낌인데, 존 레논은 스스로를 ‘군중 속에서 다색의 거울에 둘러싸인 남자’로 객관화하고 있다.
그런데 존 레논이 권총에 맞아죽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이 노랠 들으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행복은 따뜻한 권총’이라고? 그럼 그는 ‘다색의 거울들’에서 자신의 미래를 미리 봐버렸단 말인가. (알려졌다시피 존 레논은 마흔 살이던 1980년 12월 8일 한 광기어린 팬에 의해 권총 살해당했다)
이 고독한 몽상가는 현실과 상상의 접경을 오가며 스스로 만든 판타지 속에서 그 경계를 스르르 녹여버렸다. ‘Across The Universe’를 반복해서 따라 부르다 보면 이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가 어떤 정해진 음계 안에서 계산적으로 조직된 곡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박자는 중구난방이고 가사는 명확하게 분절되지 않은 채 내질러지는 한 호흡 안에서 자동기술적으로 흘러나온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상상의 우주가 현실의 언어로 의역되면서 그 자체의 리듬감을 형성하게 되는, 일종의 방언과도 같다. 추측건대 존 레논은 정신이 즉흥적으로 부양된 상태에서 일필휘지로 이 노랠 써 내려간 듯하다.
그에 비해 ‘Happiness Is A Warm Gun’은 훨씬 의식적으로 계산된 환각 이미지가 동원된다. 존 레논은 현실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환각으로 대치한다. 그러면서 삶과 죽음의 이미지가 동시에 투영되는 ‘다색의 거울’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극에 달한 지점을 꿈꾼다. 어머니이자 연인이고 삶이자 죽음 상태인 ‘행복’은 그렇듯 이 세상 속에 숨은 다른 세상 속에나 있다. 한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무수한 타자들 속에.
가출 또한 그런 게 아닐까. 평상시 나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의 바깥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나. 낯설고 길선 세상의 또 다른 지평 위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지상의 가장 사소한 법열 같은 것 말이다.
그건 책 밖으로 빠져 나와 자기가 직접 부딪친 세상에서나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육체의 극한과도 같다. 가출은 집을 떠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역설의 모험인 것이다. 이 때, ‘집’이란 단어에 ‘제도’니 ‘관습’이니 하는 단어들을 대입해도 물론, 무방하다. Jai Guru De Va 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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