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하늘 나라로 떠난 딸에게 아빠의 그림을 바칩니다.”
17일 ‘이인응 아프리카 인물 그림전’이 열린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진흥아트홀. 전시실에는 아프리카 특유의 레게 머리를 한 검은 피부의 소녀, 먼 곳을 응시하며 옅은 미소를 짓는 소년, 하얀 이를 드러낸 채 활짝 웃는 노인 등 아프리카인을 주제로 한 독특한 인물화 33점이 걸려 있다.
크레파스로 독특한 질감의 인물화를 그린 이인응(51)씨의 직업은 선교사이다. 16년 전 독일 유학중이던 그는 아내 이순환(50)씨와 함께 친구가 있는 스페인의 한 섬을 찾았다가 우연히 가까운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잠깐의 여행이었지만 그 곳에서 겪은 종교적 체험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평생의 업으로 생각했던 화가의 길을 뒤로 하고 아프리카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그는 곧장 아내와 5살, 3살 두 자녀를 이끌고 서부아프리카 세네갈과 기니 사이에 위치한 기니비사우에 들어갔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던 기니비사우는 급격한 개방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고, 내전 또한 끊이질 않았다.
“처음엔 풍토병과 피부병에 시달리며 몇 달 동안 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심성의 현지인들을 보며 여생을 아프리카 선교에 바치기로 결심했지요.”
그림은 도저히 그릴 시간이 없었다. 열악한 현지 사정 탓에 작품 활동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성경 내용을 연대기별로 몇 십 점 그린 게 전부였다.
지난해 8월 큰딸 두제(당시 20세)의 사망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각종 풍토병과 싸워가며 건강하게 자란 딸은 아빠의 재능을 이어받아 미국 테네시주 칼슨뉴먼대에서 그래픽을 전공했다. 하지만 방학 때 아프리카에 갔다 택시강도를 당해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절망과 그리움 속에 지내다 우연히 딸이 두고 간 크레파스를 발견했습니다. ‘아빠는 화가인데 왜 그림을 그리지 않느냐’는 말이 생각나더군요.”
이씨는 쓰다 남은 크레파스를 손에 쥐고 16년간 동고동락한 아프리카인들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12가지 색상 뿐이었지만 여러 차례 덧칠하는 방식으로 독특한 질감과 색상을 만들어냈다. 그림 위에는 아프리카 부족용어로 쓴 성경 구절과 딸 두제에 대한 사랑의 글을 새겼다.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딸이 제게 남겨준 선물입니다. 그림을 통해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는 이렇게 그린 그림들을 모아 지난 8월 딸이 잠들어있는 경남 진주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이씨는 내년에 다시 아프리카로 떠날 예정이다. “아프리카는 내 가족의 삶과 나의 그림이 다시 태어난 곳입니다. 그림과 선교 활동 모두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날 딸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전시회는 22일까지 열린다.(02)2230_5170
김명수 기자 lec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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