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사공부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국사개론 책은 모두 다 읽었다. 이병도 박사가 쓰신 '국사대관'은 옥편을 찾아보면서 서른 번도 더 읽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내 국사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평가해보고 싶어서 고등고시 예비고시에 응시해 보았다. 당시 고등고시는 대학 1학년 수료 이상이어야만 응시 자격이 있어서 독학생을 위한 예비고시 제도를 두었는데 시험과목이 국사와 논문 두 과목이었다. 여기서 합격했다. 이런 배경을 안고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사학과 주임교수는 이병도 박사님이셨다. 큰 기대를 하고 이 교수님의 '국사개론' 첫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국사대관'의 고조선편을 그대로 말씀하고 계셨다. 두 번째 수업 때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국사대관'을 꿰뚫고 있던 나는 슬그머니 교만한 마음이 생겼다. 강의를 듣는 것은 시간낭비란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1학기 동안 한번도 이 박사님의 '국사개론'을 듣지 않았다.
독일어도 마찬가지였다. 초급반과 중급반으로 나누어 본인이 선택하게 되어 있어 초급반을 택했다. 막상 강의를 듣고 보니 고등학교 때보다 쉬운 기초였다. 다시는 독일어 강의를 듣지 않았다.
대신 중앙도서관에 가서 사마천의 사기, 삼국지, 열국지 등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다.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도 읽었다. 역사학보 진단학보 등 국사연구실에 있는 책들도 많이 읽었다. 자연히 학교 공부는 등한시하게 되었다.
이 상태로 기말고사를 치렀더니 독일어는 C 학점, 국사개론은 F 학점이었다. 큰 충격을 받고 반성을 했다. 2학기부터는 열심히 강의도 듣고 주위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문 원서강독은 동기생 박경석(국회의원)한테 다시 배우고 영어 원서강독은 서울대 여자 수석 입학을 한 이인호(전 러시아 대사)한테 배웠다. 마음 잡고 공부를 했다. 한국의 토인비가 되겠다는 생각도 품었다.
그런데 2학년 어느 땐가 대학신문에 이숭녕 교수님의 '학자가 되는 길'이라는 요지의 글이 실렸다. 학자가 되려면 건강이 좋고, 집안에는 평생 돈을 걱정하지 않을 만큼은 경제력이 있어야 하며, 머리가 보통 사람들보다는 좋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건강도 나쁘고 돈도 없는 촌놈이었다. 머리는 보통 사람들보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에 들어와보니 다른 학생들보다 휠씬 떨어졌다.
한번은 이병도 박사님 사회로 실학에 관한 토론회에 참관을 했다. 당시 젊은 한우근 선생님이 "실학(實學)이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이라고 해야 한다"는 요지로 주제발표를 했는데 천관우 선생님(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쓴 '실학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 대한 반박 형식으로 진행됐다.
시간강사로 나오신다는 천관우 선생도 참석하셔서 한우근 선생의 날카로운 비판에 중후하게 답변을 하셨다. 마지막으로 이병도 교수님의 강평이 있었다.
"이 논문은 '천관우군의 대학 졸업 논문으로…" 나는 아연실색했다. 이렇게 훌륭한 논문이 대학 졸업 논문이라니, 쇠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숭녕 교수님의 글을 보고 흔들리던 청운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사학과 주위를 살펴보니 인재가 즐비했다. 갓 전임이 된 한우근 선생님이나 김철준 선생님은 추운 겨울에 공부하시다 통행금지에 걸려 난방도 안되는 연구실에서 주무시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국사신론'이라는 새로운 양식의 국사책을 막 출판해서 선풍을 일으킨 이기백 선생은 한문 실력이 부족하다며 수시로 국사연구실에 들려 한문 실력이 뛰어난 조교 후배한테서 한문 원전 해설을 듣고 공부하는 것도 보았다.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재들이 노력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면서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고시를 해서 공무원이 되는 길이었다.
도서관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 공부했지만 고시에 이태 연거푸 불합격이 되었다. 운이 없어 영원히 합격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심이 생겼다. 친구가 관상 대가인 백운학씨한테서 관상을 한번 보라고 권했다.
그를 찾아갔다. 백운학씨가 한참 쳐다보더니 대뜸 "생일이 3월생입니까? 9월생입니까?" 묻는다. "3월입니다" "16일생입니까? 26일생입니까?" 음력 3월26일이 내 생일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그는 어느 때인가는 고시에 반드시 합격할 운이라고 격려를 했다. 그 후로 나는 어려울 때마다 운명론을 믿게 됐다.
체신부 장관 후보라고 조각ㆍ개각 때마다 신문에 16번 거론 되었다. 어느 대통령 당선자는 1시간을 면담하며 "신장관"이라고 호칭했다. 그러나 3일 후 발표 때는 빠졌다. ADSL초고속인터넷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공로로 통신회사 사장으로서는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회사에 수 백억원의 손실을 끼쳤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6개월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이 모든 것을 나는 '운명'이라고 치부하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공군장교로 군대부터 갔다. 조용한 산속에 있는 정부특수부대에서 근무하면서 2중 철조망 속의 막사에서 사병한테 부대장이나 상관이 오는가 보라고 감시시켜 놓고 열심히 고시 관련 책을 읽었다. 덕분에 행정고시 1회에 합격을 했다.
희망하지도 않았고 체신 업무에도 문외한인 채 체신부로 배치되었다. 통신기술을 알 턱이 없었다. 고시합격자라고 해서 실무수습이 끝난 후 막바로 본부 계장(당시 사무관은 계장이라는 보직을 받고 5~6명의 직원을 데리고 있었다)이 되었으나 업무를 모르니 주사들한테 밀리고 모두 10여세 이상 연상인 선배 계장들한테 무시를 당했다.
통신기술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체신공무원 교육원 도서실에서 '통신공학'이라는 책을 빌려봤지만 전기이론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전기이론을 공부하려고 고등학교 물리학 책과 공업고등학교 전기과의 전기이론책 상하권을 구해서 읽었지만 역시 어려웠다. 서울대 공대 전기과 학생한테 가정교사도 받았다.
기초가 이해되자 전기기사 시험준비를 하는 학원에 가서 직류이론과 교류이론을 공부했다. 6개월 과정을 마치니 어지간히 기초가 잡혔다.
내가 공무원인지 모르고 전기기사 자격증 시험에 응시하라고 강사가 권했을 정도였다. 전기이론을 바탕으로 통신공학을 공부해서 기술자들의 말을 이해하고 기획을 할 수 있었다.
과장이 되고 나니 이번에는 현장 경험이 없는 것이 약점이었다. 당시 전화수리공을 체신부에서 뽑았는데 이 시험에 대비하는 학원이 을지로6가에 있었다. 그곳을 2개월 과정으로 다녔다.
점퍼를 걸치고 밤에 가면 아무도 나를 체신부 과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전화 고장을 고치려면 전신주에 어떻게 올라가서 단자함을 열고 어떻게 고쳐야 한다는 현장실무내용이었다.
나는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익명으로 책을 3권 썼다. 체신부 공무원 또는 자격증을 따려는 사람에게는 가장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0여년에 걸쳐 10만권은 팔았으리라고 추측 된다. 비교적 공무원 생활을 깨끗이 하면서 애들을 훌륭히 가르칠 수 있었던 밑천이 되었다.
국장이 되면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때의 시대상황이 호남 공직자들에는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겨 나가려면 더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위해 학원에서 매일 아침 일본어를 1시간씩 1년간 공부했다. 막판 3개월은 '성문영어'라는 영어 과목을 함께 들었다. 이렇게 하여 4년 만에 행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때는 차관이 되어있었다.
우리나라가 세계화하면서 영어를 못한다는 콤플렉스에 빠졌다. 통신회사 사장을 하면서 컴퓨터 특히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같은 실무를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다. 워낙 바빠서 제대로 공부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현직에서 은퇴하면서 나는 디지털대학교의 애니메이션 학과에 입학했고 연세어학당을 다니며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애니메이션은 막상 다녀보니 너무 전문적이어서 배워야 할 가치를 못 느끼고 1년 만에 포기했다. 영어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퇴직 후 고향의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려고 시작한 공부지만 배울수록 어렵다.
내가 평생을 바쳐온 정보통신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농촌과 접목시켜서 농촌을 살리는데 남은 생을 바칠 생각이다. 여기에 필요한 농촌공부에도 열중하고 있다.
농촌인구가 60년대에 비교해서 3분의 1 내외로 격감했는데 농촌인구감소의 주원인이 교육의 부실에 있다고 본다. 지금은 유비쿼터스 시대를 눈앞에 둔 정보화 세상이다.
그런데도 농촌에서 공부를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다고 해서 무작정 도시로만 보내려고 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극복하는데 유러닝(ubiquitous learning)이 해답이다. 궁벽진 시골에서도 인터넷을 활용하면 세계 최고의 강사진으로부터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 교육 뿐 아니라 의료 문화 관광 유기농업에 이르기까지 인터넷과 결합하여 군(郡)단위 시범군을 만들고 세계에서 벤치마킹하는 군으로 만들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어느 땐가 외국인들이 한국의 선진 농어촌을 견학하려 왔을 때 우리는 농촌을 이렇게 발전시켰노라고 통역 없이 설명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영어공부를 하려고 한다.
왜 지금도 고생하며 공부하는가 묻는 사람이 더러 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바쁘게 움직이며 자원봉사라도 하려고 공부한다."
■ 신윤식 전 하나로통신 회장은…
신윤식 전 하나로통신 회장은 초고속인터넷 시대를 연 주인공이다. 1997년 하나로통신 사장 시절 미국에서 개발된 ADSL초고속통신망을 도입,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덕분에 인터넷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됐고 오늘날 우리나라가 인터넷 활용면에서 세계에 첫손 꼽히고 인프라 구축에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
1936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으며 순천농고를 거쳐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63년 행정고시로 체신부에 발을 디딘 후 체신부 차관(1988~1990)까지 지냈다. 이어 데이콤 사장(1991~1994)과 하나로통신 사장(1997~2002) 회장(2002~2003)을 지냈다.
그는 정보통신망과 그를 통해 쏟아지는 다양한 정보를 갖고 잘 사는 농촌을 만드는 만들기 위해 '한국유비쿼터스 농촌포럼'을 올해 초 설립, '디지털 새마을 운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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