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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司 이전논의/ 주한미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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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司 이전논의/ 주한미군 역사

입력
2005.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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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은 광복과 함께 한반도에 진주했고 한국전쟁에서 3만명 이상이 전사하면서 ‘한미혈맹’의 상징이 돼 왔다. 하지만 한미 관계의 부침에 따라 감축을 반복했고 2002년 미선ㆍ효순양 사건 이후에는 한미동맹 재조정의 핵심사안으로 떠올랐다.

1945년 광복 직후 7만7,600여명 수준으로 남한에 진주했던 주한미군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32만5천,000여명까지 늘어났다. 1960년대 초반까지는 5만~6만명 선을 유지했다.

한국이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면서 6만명으로 늘어났지만 1971년 전략적 감축을 경험한다. 닉슨정부가 “아시아에서 재래식 전쟁이 발발할 경우 1차적 책임은 당사국이며 미국은 선택적이고 제한적 지원을 한다”고 선언하며 7사단을 빼나간 것이다.

1977년에도 카터 정부의 철군계획에 따라 3,000여명이 줄었다. 이 때까지 유엔사령부의 지휘를 받던 주한미군은 1978년 한미연합사가 창설되면서 명실상부한 한반도 작전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냉전이 종식된 90년대 들어 미 국방부가 아태지역 미군 전력의 10∼12% 축소를 골자로 한 ‘동아시아 전략구상’을 발표하면서 주한미군은 3단계 감축에 들어가 1차로 1992년 7,000여명이 감축됐다.

당시 한국 정계에서 평시 작전권 환수 문제가 제기돼 1994년 한국군은 주한미군으로부터 평시 작전권을 되찾았다. 동시에 북핵 위기가 터지면서 주한미군의 추가감축은 중단됐고 2003년까지 3만7,000명선의 병력을 유지했다.

21세기는 주한미군의 시련기나 다름없다. 2002년 발생한 효순ㆍ미선양 사건은 반미감정에 불을 붙여 참여정부의 한미동맹 재조정 드라이브에 힘을 실어줬다.

특히 미2사단 2여단이 한국에 통보도 없이 이라크로 차출된 사실이 드러나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둘러싼 협의에 들어갔고 2008년까지 1만2,500명을 감축하는 방안에도 합의했다.

올해 한미 방위비 분담급 협상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측 분담금이 깎였다.

김정곤 기자 j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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