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죽 한 그루가 바람을 맞으며 서있다. 바람에 맞서는 댓닢들은 칼끝처럼 벼려져 매서운 기운을 뿜어낸다. 이념이 뿌리라면 예술은 꽃일진대 이 죽을 친 군자의 기상은 또 얼마나 강직했을까.
간송미술관이 조선시대 문인화를 대표하는 난과 죽 그림만을 모아 16일부터 ‘난죽대전(蘭竹大展)’을 펼치고있다. 사군자 중에서 난과 죽 그림만을 추린 것도 처음이지만 무엇보다 조선 500년을 통틀어 묵죽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탄은 이정을 비롯 수운 유덕장, 현재 심사정, 표암 강세황,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 이하응, 우봉 조희룡으로 이어지는 수묵화의 변천을 통해 당대의 문화적 이념적 성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전시여서 주목을 끈다. 37명 대가의 작품 100여 점이 걸렸다.
난(蘭)은 거름을 탐하지않는다. 그래서 척박한 바위나 돌 모래 틈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꽃이 피면 맑고 그윽한 향이 온 산을 휘감는다. 자기 절제의 화신이다. 죽(竹) 또한 곧게 자라 설한풍을 견딘다. 곧아서 강직하며 마디가 있어 절도를 상징한다. 난과 대나무가 문사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다. 기록에 따르면 사군자 그림은 고려 때부터 문인들 사이에 널리 그려졌으나 끊임없는 전란과 보존소홀로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작품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세종대왕이나 선조도 묵란 솜씨가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해지지만 현존하는 것은 없다. 그나마 조선조 묵란의 최고봉 탄은의 작품이 간송미술관에 상당수 보존돼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세종대왕의 4대손인 탄은 이정(1554~1624)은 학문적 스승인 율곡 이이(1536~1584)의 조선성리학 이념에 공명한 첫 세대다. 문학엔 송강 정철, 서체에 한석봉이 있었다면 문인화에는 탄은이었다. ‘풍죽(風竹ㆍ바람 타는 대)’은 그의 절정기 기량이 발휘된 대표작이다.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 고유색을 표출하고자 노력한 탄은은 휘몰아치는 듯한 중국풍의 묵죽기법과 배척하고 대신 바람에 맞서면서도 고도로 정제되고 이념적인 풍죽을 완성시켰다.
진경시대를 대표하는 유덕장(1675~1756)은 탄은의 묵죽법을 계승하면서 사생적인 회화미를 첨가, 당대 진경풍속화풍과 보조를 맞췄다. 그의 말년의 역작 ‘연죽(煙竹ㆍ안개에 묻힌 대)’은 연기에 묻힌 부분은 그리지않고 과감히 생략하면서 자연스러움과 강렬한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이 구름에 가린 부분은 그리지않고 여백으로 남긴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심사정(1707~1769)과 강세황(1713~1791)은 중국화풍을 적극 수용하면서 조선화시키는데 앞장섰고, 김홍도(1745~1806)에 이르면 다시 사생적 회화성이 강조된다.
청나라의 고증학을 수용한 추사 김정희(1786~1856)는 글과 그림이 같은 원리에서 나온다는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에 입각해 서예미를 강조한 묵란을 주창했다. 대표작인 ‘산중멱심(山中覓尋ㆍ산중에 찾고 또 찾다)’은 ‘난 치는 것을 예서 글씨 쓰듯 하라’던 그의 난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글씨는 난 같고, 난은 글씨 같아 마주한 두 폭에 오묘하게 어우러진 것이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은 “시대의 이념이 바뀌면 예술양식은 자연히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라면서 “난죽화의 전통이 단순한 사대부의 소일거리가 아닌 우리 문화사, 이념사의 표출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이번 전시의 큰 목적”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30일까지. (02)762-0442
이성희 summer@hk 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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