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끊어졌지만 원조의 행렬은 어김 없이 이어졌다.
16일 오후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북동쪽 200㎞ 지점에 위치한 발라코트로 향하는 길. 가파른 산길은 곳곳이 갈라지고 산사태로 떨어져 나갔지만 세계 각국의 구호물품을 실은 트럭의 기나긴 줄을 막을 순 없었다. 평소 인적이 뜸했던 이 곳이 차량 행렬로 장관을 연출하자 구경 나온 인근 주민들은 길가에 서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지진 발생 3일 뒤인 10일 오후 늦게 파키스탄 군에 의해 길이 열리긴 했지만 발라코트행은 위험했다. 구호물품을 노리는 약탈자와 집채만한 바위를 굴리는 ‘살아있는 산’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라코트는 학생 650여명이 한꺼번에 학교 건물 밑에 매몰되는 등 가장 피해가 심했던 곳이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던 이 곳에 지난 주 월요일 늦게 도착한 일본 구조 팀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의 구조 및 구호 팀이 속속 집결하면서 재앙의 도시는 ‘구호 단체의 메카’로 변했다.
긴급환자 및 아이들의 후송을 위해 마련한 도시 중심부의 강둑 헬기장 주변엔 각국 구호단체의 베이스 캠프가 밀집해 자국의 국기를 휘날리고 있다. 일본과 파키스탄 구조 팀을 비롯해 독일 폴란드 터키 캐나다 한국 등 10여 개 국가, 20여 단체가 이 곳에 구호 활동의 둥지를 틀었다. 이 때문에 미쳐 고정 자리를 구하지 못한 구호단체는 매일 장소를 옮겨 가며 구호 활동에 매달리고 있다.
국적만큼이나 구조 활동도 다양하다. 각국은 특색 있는 구호 활동으로 한 명이라도 더 구하고, 한 명이라도 더 돌보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제일 먼저 도착한 일본 팀은 잔해더미에 묻혀 있는 시신 발굴에 매진해 사립 샤힌 학교에서 300여구의 시체를 발굴하는 개가를 올렸다.
독일 팀은 무엇보다 시급한 현지의 식수 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12톤짜리 정수 시스템을 설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터키는 앰뷸런스를 들여와 응급 환자를 헬기장이나 각국의 의료 캠프로 후송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파키스탄 팀은 노새 10여 마리에 구호물품을 싣고 차량 접근이 어려운 인근 산악지대 피해 현장을 누비고 있다.
한국의 활약도 주민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그린닥터스는 매일 임시진료소를 만들어 환자들을 돌보고 있고, 16일 뒤늦게 발라코트에 합류한 NGO 굿네이버스 의료팀은 의료키트 500개를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본격적인 의료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라마단이 끝나는 해질녘에 구호물품을 받아 든 주민들은 “고맙다”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발라코트에는 인류애가 피어나고 있지만 눈에 비치는 광경은 아직 암흑 속이다. 잔해더미를 치우지 못한 건물이 대부분이라 무너진 벽 사이로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벌써 겨울이 시작됐지만 텐트를 구하지 못한 주민들은 무너진 벽 뒤에 옷가지로 얼기설기 임시 거처를 만들어 묵고 있다. 산등성이 곳곳엔 여전히 접근할 수 없는 셀파의 마을들이 남아 있다.
17일 새벽 도시는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였지만 각국 구호단체 베이스 캠프는 희망의 랜턴을 밝히고 있다.
발라코트=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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