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땅에는 국민정서만 있고 법과 원칙은 실종되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무시당하고 천대 받던 국민들을 대변하기 위해 쓰이던 소박한 의미의 국민정서가 영향력께나 있는 세력들이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거나 반대주장을 배척하는 데 위력적인 무기로 동원되고 있다.
최근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있는 삼성 문제가 그렇고 쌀 협상 비준안, 부동산대책, 주세 인상문제도 법에 기초한 원칙보다는 국민정서가 최우선으로 고려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중앙언론사 경제부장단 간담회에서 삼성그룹 금융회사의 계열사 지분 초과보유 논란과 관련, “삼성이 명백하게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국민정서 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라며 “삼성그룹이 국민정서에 맞지 않게 법리적 논쟁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국민정서는 분명 법보다 위에 있다. 법으로 따지면 될 일을, 국민정서를 끌어들여 혼란을 더했다.
●모호한 개념을 ‘잣대’ 악용
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였던 소주세율 인상문제도 국민정서를 좇은 대통령의 한 마디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부분의 국민이 당위성을 인정하는 쌀 협상 비준안의 국회 처리도 농심(農心)을 의식한 정치권에 의해 발목이 잡혀 있다.
그렇다고 국민정서가 늘 최우선 고려사항은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연정론에 대한 비판이 거세자 대통령은 “민심을 추종하는 것만이 대통령의 할 일은 아니다”고 했다. 국민정서란 필요에 따라 끌어다 쓰기도 하고 배척할 수 있는 도구인 셈이다.
도대체 국민정서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떤 사안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적 혹은 감성적 반응을 뜻하는 국민정서라는 개념은 출처 자체가 불분명하다.
정서는 사전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 또는 감정을 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다. 개인수준의 감성적 느낌인 정서에 국민이라는 집합적인 명사를 붙이니 의미가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국어사전에도 국민정서라는 단어가 나와있지 않다.
이런 애매모호하고 불명확한 개념이 정책 판단의 잣대가 된다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국민정서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정책을 보완하는 데 활용하면 순기능으로 작용하지만, 아전인수로 악용할 경우 국가나 사회의 작동시스템에 폐해만 끼치고 불필요한 혼란만 자초할 뿐이다.
쉽게 국민정서 여론 민심 등을 내세우지만 국민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무한한 스펙트럼의 한 부분을 잘라 국민정서로 묶는 것은 애초에 무리다.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이 청와대 홈페이지 블로그에 ‘빙하와 얼음조각’이란 글을 올린 것도 여론과 민심의 이런 모순을 절감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여론의 표면적 흐름’과 ‘민심의 심연’을 ‘얼음조각’과 ‘빙하’에 비유한 조 수석은 여론(여론조사)은 “역사적 심연을 흐르는 민심을 정확히 측정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여론조사 같은 일시적 평가를 심연에 흐르는 민심이라고 받아들였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라고 했다.
조 수석은 이런 여론조사와 구별해 ‘선거결과를 통해 나타나는 것’을 민심이라고 했다. 조 수석은 굳이 여론과 민심을 구별했지만 선거로 나타난 민심 역시 여론과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시류의 반영이거나 이해관계의 표출’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법과 원칙 뛰어넘을 순 없어
국민정서는 있는 듯하지만 구체적으로 잡을 수 없고,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마치 도깨비와 같다. 이런 애매모호한 잣대로 사물을 재단하고 정책방향을 정하는 편법은 이제 사라질 때가 되었다. 국민정서가 정책 결정의 참작 혹은 고려 대상은 될 수 있지만 법과 원칙을 뛰어넘는 최우선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복잡하고 과격한 스포츠라 해도 룰이 정확하고 제대로 적용되면 탈이 없다. 서로 룰 안에서 대결하면 된다. 스포츠는 국민정서나 여론을 따지지 않는다. 룰에 따라 벌칙을 가하고 승패를 가른다.
룰이 엄격히 적용되지 않는 게임은 관객이 인정하지 않는다. 권력자나 정치인들이 편리한 대로 국민정서를 입에 담아도 정확한 룰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면 국민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방민준 논설위원 실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