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장은 14일 오전 확대간부회의에서 “한나라당은 뭐든 색깔론으로 끌고 가려는 오래된 습관을 끊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한 시간 뒤 한나라당 강재섭 원내대표는 국회 대표연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켜달라”며 “강정구 교수 구하기에 총동원되는 정권과 법질서를 뿌리째 흔드는 법무장관이야말로 국민통합을 저해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한 사회학자의 비상식적인 주장을 두고 보수ㆍ진보단체들의 보혁논쟁을 벌이는 진흙탕에 정치권도 열심히 빠져들고 있는 현장이었다. 정치권이 사회적 갈등을 통합, 조정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소모적인 논쟁을 확대재생산하고 비합리적 대결구도를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의 이 같은 행태는 늘 반복돼 왔다. 의미 있는 소득도 없이 상대에게 깊은 상처와 앙금만 남긴 채 끝났다는 공통점도 있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논의, 사법부의 판단을 구하는 인내심은 우리 정치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2003년 송두율 교수의 처리 문제가 그랬다. 그 해 9월 송 교수가 귀국하면서 정치권은 그의 사법처리 여부를 놓고 몇 개월 동안 사생결단식의 이념 논쟁을 벌였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송 교수 포용론’을 펼쳤고, 강금실 법무장관도 송 교수 처벌에 부정적 언급을 했다. 이에 한나라당은 “현 정부 핵심에 북한과 연계된 세력이 있다”“송 교수 옹호는 국체를 뒤흔드는 친북세력의 발호”라고 맹공을 펼쳤다. 두어달 동안 이념대결의 굿 판을 벌인 후 정치권은 이 일을 잊어버렸다. 지난해 7월 법원이 송 교수에 대한 간첩죄는 무죄로, 북한 밀입국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판결하고 집행유예로 석방했을 때 정치권은 별다른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7~8월 하한 정국을 뜨겁게 달군 국가 정체성 논란도 마찬가지였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월선 및 군의 허위보고, 의문사위의 간첩 혐의자 민주화유공자 판정 등을 거론하며 “집권층이 근본을 흔들고 있다. 전면전을 할 수도 있다”고 공박했다. 우리당은 “유신세력이 정체성 운운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라며 맞받아쳤다. 이 역시 결론 없이 상대방 흠집내기만 하고 유야무야됐다.
지난해 12월8일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이 1992년 북한 노동당에 입당, 지금까지 암약하고 있다”고 폭로하면서 불거진 간첩 논란도 비슷했다. 우리당이 “간첩조작사건, 수구세력의 백색테러”라고 반격하는 등 여야간 험한 말만 오간 채 흐지부지됐다.
이처럼 때만 되면 반복되는 정치권의 색깔론 시비는 출구없는 소모적 논쟁일 뿐이다. 경제적 관점에 바탕을 둔 본질적 논쟁은 없고 오로지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는 말초적 관점에서만 전개된다.
고려대 법대 장영수 교수는 “강 교수건은 개인의 문제를 정치권에서 지나치게 확산시켜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며 “지역감정을 선거에 악용하듯, 보혁논쟁도 그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정치학과 김세균 교수도 “정치권이 벌이는 이념충돌은 대부분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모를 정도의 불필요한 논쟁일 뿐이다”며 “대중의 정서를 쓰다듬어야 할 정치권이 오히려 국민을 분단과 냉전의 볼모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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