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너무 강퍅하다. 지나치게 단정적이고, 독한 얘기로 넘친다. 튀어야 산다지만 연예인도, 영업사원도 아닌 사람들까지 막무가내로 튀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지금은 적어도 지식사회가 튀어야 할 시대는 아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소리를 죽여 하는 말은 침묵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책임의 방기이자 폭압적 권력에 대한 굴종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때 몇 사람의 굵직한 목소리는 국민의 가슴을 파고 들어 도도한 물결로 역사를 움직였다.
●도시의 매미는 세게 운다
그런 시대가 갔다. 사회는 민주화했고, 웬만큼 먹고 살게도 됐다. 바람직한 세상 모습을 둘러싼 근본적 변화의 필요성이나 그 수단을 둘러싼 논쟁도 역사적 현실감을 상실했다. 국민 각자가 성실하게 자기 할 일을 하고, 구멍 난 사회안전망을 기워가면서 더 나은 세상으로 조금씩 나아가자는 합의가 뿌리내렸다. 그런데 때아닌 새된 소리로 세상이 시끄럽다.
서울 가로수에 붙은 매미들은 확실히 산 속의 매미보다 세게 운다. 처음 아파트가 줄지어 선 한강 변을 지나며 매미소리를 들었을 때는 여름 정취를 살리려고 누군가가 일부러 확성기를 틀어 놓은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주위의 자동차 소음을 뚫고 암컷의 관심을 끌려다 보니 센 소리를 내게 됐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들은 후로는 약간의 연민을 얹어 서울의 매미소리를 듣게 됐다.
사람들은 매미와 다르다. 그래야 할 처지가 아닌데도 고함을 지른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도 그런 예다. ‘6ㆍ25는 통일전쟁’이란 그의 주장 자체는 새삼스러울 게 없다.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을 둘러싼 학문적 논쟁 과정에서 다양한 시각의 하나로 거론된 내용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전쟁광이자 살인자’라는 정의적(情意的) 서술에 이르는 순간 그는 이미 스스로 학문적 논의의 틀에서 빠져 나와 있었다. 되짚어 보니 애초의 ‘통일전쟁’이란 말조차 전쟁의 원초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도덕적으로 정당한 전쟁을 미국이 막았다는 인식이다. ‘태평양전쟁은 아시아 공동번영을 위한 자위 전쟁’이란 식의 의미 부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왜 그렇게까지 소리를 질러야 했을까. 그의 발언에서 짚이는 게 있다. 그는 “맥아더를 원수(怨讐)라고 표현한 것은 지나쳤다”고 한 발 물러서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남침을 주장하는 사람은 북한 정권을 인정하는 것이니 국가보안법 사법처리 대상”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 이미 헌법이나 국보법 위반이 아님을 모를 리 없는 그다. 작게는 흐리멍덩해진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의 재점화, 크게는 국민적 무관심에 가로막힌 특정 세력의 사회적 의제 설정 주도권 회복 의도가 읽힌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성공적이다. 이미 보수진영은 강 교수의 주장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구시대적 도구의 총동원을 주장하고 나섰다. 국보법 위반 혐의로 즉각 구속해서 수사하라고 수사당국을 압박했다. 그 정도로 흔들릴 사회가 아니고, 민주적 다양성의 한 측면으로 봐도 될 것이지만 그들 또한 그런 체질이 아니었다. 법무장관의 불구속 수사 지휘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눈앞의 문제에 매달려 무관심했던 국민들도 한쪽에서는 “본때를 보이자”고 외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회를 살리자”고 외치는 모처럼의 구경거리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본때!'와 '찬스!' 사이
적당한 화해와 인내를 견디지 못하고, 사회를 치열한 대결 구도로 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그들은 도시의 매미처럼 새된 소리를 낸다. 짧은 파장의 새된 소리는 가까?가면 귀가 따갑지만 조금만 멀리 가도 들리지 않는다. 긴 파장의 낮은 소리가 더욱 멀리 간다.
이왕 새된 소리를 택한 그들에게 휘말리지 말자. 지겨운 이 싸움의 끝장을 보는 것도 다름아닌 다수 국민의 거리 감각을 통해서다. 그러니 이제 낮은 소리로 말하고, 또 그런 소리에 귀 기울이자.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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