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던 13일 저녁 그 시각, 문학하는 젊은 교수 한 분이 ‘일 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첫 마디는 “다른 사람이군요. 거, 참….” 바쁜 터라 서둘러 대화를 수습하지 않았다면 통화는 길어졌을 테고, 노벨상의 한계며 변방언어의 비애며 숙제며 하는, 10월 이맘 때의 식상한 푸념들이 어김없이 곁들여졌을 것이다. 그게 싫었다.
그는 후보로 거론되던 시인과 이렇다 할 친분도 없는 터였고, 평소라면 일 때문에 통화하기도 힘든 인사다. 미안해서 기사 마감 뒤 전화를 걸었다. 그 역시 겸연쩍었던가 보다.
“예년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올해는 그게 아닙디다.” “그러게요. 막판에는 도박사들 베팅 순위에도 맨 윗자리였다더군요.” “시인에게도 며칠 전부터 국제전화가 꽤 걸려왔다죠. 현지 분위기도 그럴듯했나 봐요.”
아니나 다를까. 대화는 결국, “야스나리의 ‘설국’은 번역 문장이 원작보다 낫다지 않느냐” “파묵은 교육을 잘 받아 영어를 모국어처럼 쓴다더라”로 스산하게 이어졌다.
늦은 밤 열어 본 전자우편함에는 낯 익은 작가의 메일이 ‘마이 컸죠?’라는 제목을 달고 들어와 있었다. “남의 잔치 구경만 하다가 우리 일이 되고 보니 문학기자 힘들죠? 그래도 우리 문학 이만하면 많이 큰 거 아니에요?”
그랬던 것일까? 예년과 다른 아쉬움과 허탈감도 잔치의 주체들만 느낄 수 있는 특권적 감정이고, 평론가와의 ‘일 없는’ 통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던 것일까? 물론 노벨상이 문학성 따져 점수대로 주어지는 것 아니고, 해당 국가의 문학에 대한 훈장도 아님은 누구나 알고 그들도 안다. 그래도…, 어쨌든, 그게 예년의 10월과 올해가 다르다면 달랐던 점이다.
최윤필 문화부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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