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김대건 정약용… 고난으로 점철된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브뤼기에르(1792~1835) 주교를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조선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뒤 순교의 땅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 눈을 감은 한국 천주교회의 썩은 밀알.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20일 오후2시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에서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170주기 추모ㆍ현양 미사를 봉헌한다.
미사는 정진석 대주교, 염수정 주교 등 사제단이 공동 집전하며 프랑스 주교단과 사제단, 신자 등 40여명도 참석한다. 이 자리에서는 현양 기도와 그의 생애를 담은 동영상 상영도 진행된다. 천주교는 이날 미사를 계기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업적을 본격 재조명키로 했다.
18세기말, 19세기 초 조선 천주교는 순교가 이어지는 고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중국의 주문모 신부가 선교활동 중 순교하자 조선의 신자들은 로마 교황청에 사제를 보내달라는 애원의 편지를 계속 보냈다. 하지만 순교의 칼날이 기다리는 조선에 선뜻 가려는 사제가 없었다.
프랑스인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9년 자신이 속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어찌하여 조선 전교를 머뭇거립니까. 과연 어느 사제가 이런 위험한 사업을 맡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교황청 포교성 장관에게 교황의 허락을 얻어주도록 간청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마침내 조선 포교지를 독립 교구로 하고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다.
당시 이미 동남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는 자신이 초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된 사실을 전해 듣고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 입국을 시도한다. 하지만 끝내 조선에 들어가지 못한 채 내몽골의 한 교우촌에서 눈을 감는다.
그는 자신이 조선에 못 들어 갈 수도 있다고 판단, 조선교구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고 모방 등 탁월한 신부들을 발탁, 조선을 맡기는 등 미리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몇 차례의 박해에도 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 조선에 들어왔으며 모방 등은 나중에 조선에서 순교했다.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사업을 주도한 개포동 본당 염수의 주임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없었다면 조선 교구의 설립은 한참 미뤄지고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도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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