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꽃의 물결, 바람을 붓질하다.
제주는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 사철 끊이지 않는 제주의 바람에 뭍의 바람은 감히 견줄 수조차 없다. 가을은 제주보다 오래된 투명한 바람이 모습을 드러내는 계절이다. 산과 들에 흐드러진 억새꽃 다발이 붓으로 살아 나 ‘휘, 휘’ 바람을 그려낸다.
제주는 지금 섬 전체가 바람꽃, 억새로 새하얗다. 깎아지른 바닷가 절벽에도, 산담 두른 무덤가에도, 아스팔트 도로 옆에도 억새꽃 무더기는 하얗게 바람을 노래하고 있다. 제주가 바람의 섬이 된 것은 어쩌면 그 바람을 보여줄 억새가 많아서 일지도 모른다.
허옇게 샌 늙은 머리카락 같은 억새. 단풍이 가을을 대표하는 색이라 하지만 깊어 가는 가을을 제대로 표현하는 데는 억새가 제격이다. 단풍의 현란함은 지나는 시간에 대한 거부의 몸짓에 가깝다. 그러나 억새의 수더분한 색은 순응하며 준비하는 차분함으로 감겨 온다.
가을에 피어나는 하얀 솜털. 억새꽃은 바람을 그리는 붓이면서 태양빛을 담아내는 팔레트다. 청명한 가을 햇살을 눈부신 은빛으로 부숴내고, 어둠이 틈입해 오는 해돋이땐 황금빛으로 맞는다. 스러져가는 태양이 노을을 퍼뜨릴 때, 억새는 진한 구릿빛으로 장엄한 일몰의 종지부를 찍는다.
바로 거기 제주, 가을이 있었다. 새벽녘 남제주군 대정읍의 송악산에 올랐다. 일출을 전후로 시시각각 달라지는 태양 빛이 억새라는 프리즘을 통해 분산되기도 중첩되기도 하는 곳.
높이 104m밖에 안 되지만 송악산에서의 전망은 제주에서 손꼽힌다. 토끼 꼬리 마냥 바다로 툭 삐쳐 나온 지형의 끝 지점인 덕에 제주도와 한 몸이되, 바다 너머로는 제주도 전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수평선의 붉은 선이 짙게 물들기 시작했다. 때 맞춰 바다 위에는 바위를 쪼개 놓은 듯한 형제섬, 멀리 한라산의 윤곽이 점점 진하게 나타났다. 여간해선 구름 속에서 나오지 않는 한라산이 꼭대기까지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장려한 풍광이 펼쳐졌다.
옥황상제가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졌다는 산방산의 바위 주름까지 훤하게 보일 즈음, 바다에 낮게 깔린 구름 위로 말간 해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그렇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 즈음, 억새가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금가루 부서져 내리듯 황금빛이 찰랑찰랑. 몽환의 빛.
해가 떠오르며 억새꽃이 슬며시 찬란한 은빛으로 바뀔 무렵, 산자락을 조금 돌아 나가니 남쪽 바다 저편에 가파도와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 아스라이 떠 있다. 섬이라기 보다는 항공 모함이나 인공 기지라 해야 제격일, 평평한 땅이다.
송악산의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에는 여기저기 숭숭 동굴이 뚫려있다. 모두 15개. 파도가 만든 해식 동굴에다 식민 지배 당시 일제가 어뢰정을 숨기기 위해 파놓은 인공 동굴까지 합쳐져 있다.
일본이 연합군과의 마지막 결전을 위해 준비한 요새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도로변에는 일제가 미군의 공습에 대비해 만든 방공호도 있다.
역사의 흔적은 억새의 수런거림과 함께 시간의 일부가 돼 가고 있었다.
● 송악산 뿐만이 아니다. 제주는 전체가 억새의 섬. 도처에 억새가 빛을 발하며 주변 가을 풍경에 악센트를 주고 있다.
● 가장 큰 억새 군락지를 꼽는다면 북제주군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산굼부리를 얘기할 수 있다. 산굼부리는 ‘산에 있는 큰 구멍’이란 뜻.
국내 유일의 마르(Maar)형 분화구다. 화산이 폭발했는데 분출물이 없이 가스만 뿜어져 나온 특이한 분화구란 뜻이다. 잘 해봤자 가스라며 무시할 수는 없다.
● 분화구 크기가 백록담을 능가한다. 또한 내부의 식생이 식물의 보고라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기다. 분화구 주위를 둘러싼 억새밭을 보러 오는 이들로 북적대는 때가 바로 이맘때다. 억새의 바다 너머로 한라산과 주변의 오름들이 빚어내는 풍경이 장관이다.
● 산굼부리가 있는 교래리는 억새가 많은 지역. 특히 삼다수공장 옆은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지난 주말에는 한바탕 신나는 억새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드라이브 천국인 제주에서 억새를 가장 잘 감상하는 방법은 바로 드라이브다. 억새 없는 길이 없다. 억새 드라이브로 어느 길이 가장 좋으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모든 길이 다 좋다”이다.
● 바다와 함께하는 억새에도, 오름과 함께하는 억새에도 자기만의 멋이 있다. 바람을 그려내는 억새의 조화 때문인가, 억새가 그려낸 바람의 조화 때문인가.
제주=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가볼 만한 명소 5곳
추색(秋色)은 단풍의 화려함과 억새의 은은함으로 나뉠 것이다. 억새의 빛이 보다 메말라 보이는 까닭에 단풍이 억새보다 빠를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 억새는 9월 중순부터 벌어지니 오히려 단풍보다 이르다.
그 억새꽃이 만발해 빛을 부서뜨리는 때가 바로 이맘때다. 은빛 축제가 열리는 전국의 억새 명소를 안내한다.
♣ 밀양 사자평 고원
우리나라 억새 군락으로는 가장 넓다. 재약산(1,189m) 수미봉부터 사자봉 일대의 해발 800m 되는 고원 지대의 140만평에 억새 장관이 펼쳐진다. 고원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알프스에 견줄만하다고 해서 붙은 영남 알프스의 한 부분으로 가을이면 전국에서 억새 순례객이 몰려드는 곳이다.
평평한 고원인 이 억새밭은 전흔이 짙다.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표충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훈련시켰던 곳이고, 여ㆍ순 반란사건 때는 빨치산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사자평으로 오르는 길은 밀양에서 표충사로 곧바로 이어지는 길, 쌍폭포를 지나 고사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첫번째 길은 시간을 20~30분 단축시킬 수 있지만 고개가 가파르다. 쌍폭포로 돌아가는 길은 완만한 편. 제법 산행을 즐기고 싶다면 표충사길을 권한다.
표충사에서 홍룡폭포, 고사리 마을을 지나면 정상으로 향하는 억새밭이 시작된다. 억새밭 너머로 멀리 영남 알프스의 우람한 산세가 한층 볼거리를 더한다. 표충사에서 폭포로 이어지는 길가의 옥류동천 주변에는 단풍도 반겨준다. 밀양시 문화체육과(055)359-5646
♣ 창녕 화왕산
화왕산(757m) 은 봄과 가을 일년에 두 번 매혹적인 색깔 옷으로 유명하다. 봄에는 산을 온통 불태우는 것 같은 진달래로 붉은 융단을 뒤덮고, 가을이면 정상의 평원이 억새 물결로 하얀 솜이불을 덮는다.
3시간 남짓한 화왕산 산행은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창녕여중에서 시작한다. 40분쯤 오르면 도성암. 통도사의 부속 암자로 깔끔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정상까지 닿는 50여분의 여정은 힘겹다. 오죽하면 길 이름이 ‘환장 고개’일까. 네 발로 기어 오르다 보면 고개가 끝나는데, 그 곳이는 정상. 화왕산성이 에워싼 가운데 분지가 억새의 군락지다. 5만6,000평 가득 억새 바다가 펼쳐진다.
화왕산 억새밭을 한 바퀴 도는 데는 한 시간 남짓. 능선을 오르내리며 다양한 모습의 억새를 볼 수 있다. 화왕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창녕땅의 풍경 또한 압권이다.
50만평의 거대한 우포늪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의 풍경에 입이 벌어진다. 우포늪은 원시의 생태계를 간직한 국내 최대의 늪지대. 이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억새와 비슷한 갈대의 바다. 창녕군 관광개발추진단 (055)530-3121
♣ 포천 명성산
해질녘 산정호수에 길게 산 그림자를 드리우는 명성산(921m)은 수도권 최고의 억새 명산. 산 전체가 암릉과 암벽으로 이뤄져 산세가 당당하다. 산정호숫가에서 바라보면 온통 바위절벽을 두르고 있는 주능선 너머가 억새꽃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명성산이 억새의 명소로 더욱 이름을 날리는 이유는 주변 경관이 빼어나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가장 먼저 억새꽃을 피운다고 알려져 있다. 어느 길을 택하든 등룡폭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억새 군락지가 시작된다. 삼각봉 9부 능선에 어마어마한 억새 능선이 펼쳐진다.
정상에 오르면 강원 제 1의 평야라는 철원평야와 한탄강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광덕산 주흘산으로 이어진 능선이 한 눈에 들어 온다.
명성산에 깃든 두 전설. 후삼국 시대 왕건에게 쫓기게 된 궁예가 처지를 한탄하며 크게 울어 명성(鳴聲)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 신라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향하다가 커다란 바위산에 올라 설움에 복받쳐 엉엉 울었더니 산도 함께 울어 이름이 붙었다는 2가지 이야기가 내려온다. 포천시 문화공보과 (031)538-2073
♣ 정선 민둥산
정선군 남면의 민둥산(1,118m)은 이름처럼 나무가 없는 민머리 산이다. 산의 머리가 벗겨진 이유는 나물 때문. 나물 많은 정선 중 특히 이 곳에서 산나물이 많이 났기 때문에 매년 한 번씩 불을 질렀다고 한다.
1950~60년대 땔깜으로 나무를 베어다 쓰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설도 유력하다. 하여튼 둥그스름한 산 능선을 타고 끝없이 펼쳐진 억새밭 20여만평 가량은 이맘때면 더할 나위 없는 장관을 연출한다.
민둥산 억새 산행 기점은 해발 800m 고지의 발구덕 마을. 지반이 여기 저기 움푹 팬, 카르스트 지형의 독특한 형태를 보여준다. 꺼진 구덩이가 8개라 해서 ‘팔구뎅이’라 불리다가 발구덕으로 이름이 굳어진 것.
산행은 증산역에서 멀지 않은 증산초등학교 옆에서 시작된다. 산 옆구리의 능전마을에서 출발하면 발구덕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 그러나 길이 좁아 사람이 많이 몰리는 억새철에는 오도 가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되려 산 아래서 걸어 올라가는 편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증산초등학교에서 민둥산 정상을 거쳐 지억산(1,157m) 능선을 타고 동면의 화암약수까지 이어진 등산로는 약 15km로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산세도 넉넉하고 길도 뚜렷해 서울에서 당일 산행지로 즐길 수 있는 코스다. 정선군 관광문화과 (033)560-2361
♣ 홍성 오서산
오서산(791m)은 충남 서해의 전망대다. 인근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천수만과 보령 앞바다를 오가던 크고 작은 배들이 이 산을 바라보고 방향을 잡는다고 해서 ‘등대산’이란 별명도 붙었다. 주변에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산이 없어 유난히 우뚝해 보인다.
오서산은 가을산이다. 10월이면 산정에 억새가 피고 산 아래 광천에서는 김장철을 앞두고 새우젓을 사려는 사람들로 성시를 이룬다. 오서산 등산로 초입은 상담마을. 마을에서 30분쯤 오르면 정암사다. 등산로는 정암사를 지나며 본격화하는데 40도가 넘는 경사에 숨이 힘겹다. 8부 능선에 올라서면 오서산 산행의 재미가 시작된다. 서해의 확 트이는 시야가 발걸음에 힘을 실어 준다.
억새밭은 9부 능선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정자 오서정부터 정상으로 이어지는 2㎞되는 길목에 억새가 산재해 있다. 오서산의 억새는 조밀하지 않다.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이 곳의 억새는 서해로 지는 해넘이와 어우러진 모습과 함께 독특한 감흥을 자아낸다. 홍성군 문화관광과 (041)630-1224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여행수첩/ 제주도
● 송악산은 중문 단지에서 제주 순환 도로 12번 국도를 타고 서쪽인 대정 방면으로 가다 안덕을 조금 지나 산방산 방향으로 접어 들어 사계리 해안 도로를 타고 달리면 된다.
산방산에서 송악산까지는 20여분. 해안도로 중간에는 잠수함 관광소(063-794-0020)가, 송악산 포구에는 마라도행 유람선 선착장(794-6661)이 있다.
● 산굼부리는 제주와 서귀포를 잇는 11번국도(5ㆍ16 도로)의 중간에서 1112번 지방 도로로 진입해 구좌방명으로 10분 정도 달려 교례 사거리를 지나면 보인다.
1112번 도로는 제주의 도로 중 가장 아름답다는 도로. 도로 양옆에 도열해 끝없이 이어지는 삼나무 가로수에 이국적 풍취가 자욱하다.
1112번 도로를 타고 구좌 방면으로 가다 송당리에서 16번 국도로 우회전하면 좌우로 제주의 아름다운 오름중에서도 손꼽는 아부오름,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동거문오름 등을 스쳐 지날 수 있다. 억새와 어울리는 풍경으로 제격이다.
● 고급 펜션을 원한다면 중문 관광 단지에서 4km 거리의 재즈 마을을 추천한다. 넓은 정원을 가진 통나무집 펜션으로 아늑하다. 12월 말까지 매주 토요일 펜션 내 바비큐장에서 바비큐 파티가 벌어진다. 숙박료 10만~16만원. (064-738-9300, www.jazzvillage.co.kr)
■ 장흥 천관산
억새 명산은 전국에 많지만 풍광으로 따지자면 전남 장흥의 천관산을 따를 곳이 없다. 특히 다도해를 붉게 달구며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억새의 장관은 어디에도 비길 바 못 된다.
그 감동을 만끽하기 위해 서울서 6시간을 내달려 정남진(正南津)의 고장 장흥에 도착했다.
등산의 시작점인 천관산 문학공원을 찾은 시간은 오후 3시 30분께. 억새 산행 시간을 느지막한 오후로 잡은 것은 억새와 태양의 절묘한 어우러짐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였다.
억새가 제 혼자서 아무리 발버둥을 친들 단풍을 따라올 리 만무하다. 그러나 태양이 조명을 받쳐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태양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흰색, 은색, 황금색, 갈색으로 요술을 부린다. 흡사 프리즘을 통과한 무지개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이 형성된다.
그 중 역광을 받아 은빛으로 출렁이는 억새의 군무는 단풍이 흉내도 못 낼 경지다. 억새 명산에는 오히려 저녁나절에 인파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탑산사 입구에 자리잡은 천관산 문학공원에 든다. 마치 전북 진안의 마이산으로 공간 이동한 착각을 일으킨다. 볼거리 없는 진입로에 널브러진 돌더미를 주민들이 차곡차곡 쌓아 돌탑을 만들었다.
5년전부터 조성한 돌탑은 개수만 400개를 넘는다. 돌무더기로 기단을 만들고, 때로는 바위 덩어리를 올려놓고 시를 새겨 생명을 불어 넣기도 했다. 시인 구상 문병란,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 최일남 전상국, 수필가 안병욱 등 54명의 내로라는 작가들이 직접 선정한 자작시들이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구상, 꽃자리)’. 싯구는 곧바로 현실이다. 야생화 천지인 공원 일대.
오밀조밀 꾸며진 공원을 구경하느라 정신 없는 나그네의 등을 동반한 일행 중 한 명이 떠밀지 않았으면 이날 등산은 물거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본격 산행에 나선다. 탑산사 옆으로 난 돌계단이 산행의 시작을 알렸다. 일반 산행길은 평평한 길을 걸으며 워밍업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는 숫제 암벽타기에 가깝다. 해는 제법 서쪽으로 치우쳤다. 마음 급한 나그네의 걸음은 바빠지지만, 호락호락 길을 내주지 않는 산세가 야속하기만 하다.
10분을 올랐을까. 불쑥 솟은 바위 덩어리가 눈길을 잡아 챈다. 포봉이라는 바위이다. 세 개의 바위가 마치 하나처럼 붙어 거인처럼 버티고 서 있다. 바위에 올라 처음으로 뒤를 돌아다 보았다.
멀리 구룡봉이 한눈에 보인다. 구룡봉 아래는 콘크리트로 단을 세운 암자들이 즐비하다. 독특한 산 기운 탓인지 예부터 기도 도량이 많았다고 한다.
턱끝까지 차오른 숨결을 진정시켜가며 다시 20분을 올라 불영봉 삼거리에 도착했다. 이제 조금 한숨 돌리려니 생각했는데 이 산은 그도 허용하지 않는다. 또 한 번 “헉”하며 숨 넘어가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다도해의 섬들이 마치 연봉처럼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멀리 오른쪽 끝으로 해남의 두륜산이 자리하고, 완도의 상왕봉과 고금도가 강진의 마량만을 마주보고 도열하고 있다. 왼쪽으로는 거금도와 소록도가 아련한 자태를 뽐낸다. 맑은 날이면 제주 한라산 정상도 눈에 보인다고 한다.
이제부터 정상인 천관산 연대봉(723m)까지는 다도해의 섬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다. 동행이 많아지니 더더욱 든든하다. 연대봉으로 오르는 길부터는 한껏 자라난 억새의 향연이다. 바람의 방향, 태양의 각도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단일의 색을 내는 억새는 잘 훈련된 매스게임 부대였다.
산행길에 마주친 벽안의 청년이 연신 내뱉는 “원더풀”이 전혀 밉지 않다. 하긴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 사이에 간간이 모습을 들이 내민 고궁이 한국미의 전부라고 생각했을 그가 이런 장관을 맛보았으니 그 감동이 오죽했으랴.
연대봉 봉수대를 기점으로 대장봉까지 이어지는 평지는 그야말로 억새 평원이다. 능선을 따라 40만평에 달하는 은빛 억새는 노을이 짙어감에따라 금빛으로 변하더니 끝내는 검붉게 타오른다. 능선 저 너머로 아기바위, 사자바위, 종봉, 천주봉, 관음봉 등 연봉이 마지막 붉은 기운을 토해낸다.
스러져 가는 태양도 그에 질세라 마지막 빛을 쪼이니, 그에 화답하듯 반짝이는 그 장관은 영락없는 면류관이다. 하늘의 왕관을 썼다는 천관산(天冠山)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알겠다.
천관산(장흥)=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 억새와 갈대 구분법
억새와 함께 가을을 알리는 또 다른 전령이 있다. 갈대. 문제는 억새와 갈대를 가려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피는 시기도, 생김새도 비슷하다.
백과 사전에 따르면 굵은 원기둥 모양인 억새는 뿌리 줄기가 모여 피어 나는 것으로,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지고 가장자리는 까칠까칠하다. 한편 갈대는 뿌리 줄기의 마디에서 많은 황색의 수염 뿌리가 나며, 줄기는 마디가 있고 속이 비었다는 설명이다. 말로 풀면 명쾌하지만 그를 토대로 일반인이 둘을 구분해 내기란 쉽지 않다.
억새와 갈대를 구분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어디에서 자라느냐를 보는 것이다. 억새는 주로 산이나 뭍에서, 갈대는 물가에서 자란다. 물가에서 자라는 것은 대부분 갈대이지만 가끔 억새도 있다.
그러나 산에서 자라는 것은 모두 억새라고 생각하면 된다. 또 색깔로 봤을 때, 억새는 대체로 은빛 또는 흰색이지만 갈대는 고동색이나 갈색이 많다는 점도 알아두면 좋다.
키로 구분하는 방법도 있다. 햇볕을 많이 받아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억새는 길이가 다섯자 안팎. 이에 비해 갈대는 2m를 넘는 것이 보통이며 3~4m 이상 자라는 것도 흔히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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