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14좌(해발 8,000미터가 넘는 고봉 14개)를 완등한 엄홍길씨. 세계적인 스타 산악인이지만 등산화 한번 잘못 고른 후유증을 지금도 앓고 있다.
“1980년대 초반 설악산을 종주할 때였어요. 외제 등산화를 신었는데 처음엔 몰랐어요. 하루 이틀 산행이 계속되니까 발이 붓기 시작하는데 한국인 족형에 비해 폭이 좁게 나온 신발 때문에 발이 터질 것 같이 아파요. 밤이면 신발 갑피에 쓸려 터진 발등과 발가락 마디에 약을 발라가며 겨우 겨우 버텼는데 산행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서 보니 왼발 엄지 뼈가 골절돼서 튀어나왔더라구요. 지금도 장기 산행을 하면 그 뼈 때문에 통증을 느껴요. 등산화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뼛속 깊이 느꼈지요.
산행의 계절이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시원하다. 산악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주말 가벼운 등산을 꿈꿀만하다. 주 5일 근무제 실시 이후 폭발적으로 늘고있는 아웃도어 열기를 반영하듯 등산화를 찾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등산복 만큼 유행을 타지는 않지만 등산화도 최근엔 산행의 유형에 따라 기능과 패션이 세분화하는 추세다.
LG패션 아웃도어 브랜드 라푸마 등산화 디자이너 홍승희씨는 “산의 높이나 계절에 상관없이 일년 내내 가죽 등산화 한 족으로 버티는 사람들은 이제 드물다”면서 “산행 인구가 늘어난 만큼 등산화도 다양해진 산행의 목적에 맞춰 고르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
등산이 세분화한다
등산화의 세분화 추세는 이전처럼 등산이라는 한 마디로 산행을 뭉뚱그릴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주로 흙산의 능선을 타는 것은 트레킹, 바위산을 타는 암벽 등반, 빙설벽이나 고산을 오르는 마운틴 러닝, 야트막한 산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오르는 하이킹 등으로 산행이 세분화하면서 등산화도 다양한 제품이 쏟아지고 있다.
●초경량 등산화 숲길, 하이킹, 가벼운 야외 산책 등 아웃도어 전반에 활용된다. 무게 200~250g 내외로 무게를 줄이기 위해 로우컷(low cutㆍ 복숭아 뼈를 덮지않는 길이) 디자인이 일반적이다.
●경등산화 보통 300~400g정도의 무게로 가까운 산이나 2~3일 정도의 봄 가을 짧은 산행에 적합하다. 발목 길이의 미드컷(mid cut)과 로우컷 두 종류가 일반적이며 가죽과 메쉬 소재를 반반씩 섞었다. 방수 투습 기능이 필수. 5㎜ 정도 큰 것을 고른다.
●중등산화 가죽 소재를 80% 이상 써서 무게는 500g대. 겨울산이나 빙벽산을 등반할 때 좋은 겨울용 등반화로 투박하고 무겁다. 눈이 들어오는 것을 피하고 발목을 보호하기 위해 하이 컷(high cutㆍ군화 길이) 재단돼 있는 것이 일반적. 해발 5,000m까지 착용 가능하며 방수 투습 기능은 필수. 두꺼운 양말을 고려해서 10㎜ 정도 큰 것을 고른다.
●암벽 등산화 바위 능선이나 쉬운 암벽 등반시 적합하며 봄부터 가을까지 좋다. 가볍고 발이 편하며 바위에서 마찰력이 뛰어나지만 물에 잘 젖고 보온력은 떨어진다.
●아웃도어 샌들 여름철 계곡 등반이나 야외 활동시 적합하다. 바위에서 미끄럽지 않고 잘 마르는 장점이 있으나 산길이나 숲길에서는 발을 다치기 쉽다.
●마운틴러닝 빙설벽이나 고산 등반시 적합하다. 가볍고 쿠션과 안정성이 높아 산악 조깅에 좋다. 10㎜정도 여유가 있는 것을 고른다.
가벼울수록 좋다
경량화도 최근 등산화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등산화 전문업체 트렉스타 기술 자문을 맡고있는 엄홍길씨는 “산에서는 단 몇십 그램 차이도 발의 피로를 좌우한다”면서 “최근 가죽 보다 가벼우면서 내구성이나 보온성 등이 향상된 신소재가 많이 개발된 데다 불필요하게 신발 갑피에 덧붙이는 장식을 없애는 쪽으로 디자인이 기능적으로 바뀌어 경량화 추세에 한 몫 한다”고 말했다.
전에는 갑피 전체를 누벅(소가죽의 껍질을 한풀 벗긴 소재)이나 세무로 덮던 것이 요즘엔 신발 앞부분이나 뒷꿈치 등 꼭 필요한 부분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방수 코팅된 메쉬 소재를 쓰는 것이 좋은 예다. 또 방수 및 투습성이 좋아 발을 항상 쾌적한 상태로 유지시켜 주는 고어텍스 등 기능성 소재를 집중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중량 대비 기능성을 높이는 결과를 낳는다.
산에서도 멋지고 싶다- 패션화
홍승희씨는 “산위에서도 ‘한 패션’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짜’(전문성을 강조하기 위해 산악장비의 구색이나 패션에 관심에 기울이는 사람을 일컫는 업계 용어) 근성이 아웃도어 붐을 타고 일반인까지 확산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등산화 업체가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은 감각적인 유행 색감을 활용한다는 점. 기존의 무겁고 칙칙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다.
라푸마는 올해 블랙 컬러와 함께 가장 각광받고 있는 바이올렛을 여성용 등산화에 적용, 좋은 반응을 얻었다. 홍씨는 “중장년층의 소일 거리였던 산행이 웰빙 바람을 타고 젊은 층에서 급속히 인기를 얻고 있다”며 “등산화 부문의 패션 욕구는 갈수록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