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파키스탄 강진 현장을 가다/ 고찬유 기자 최대 피해 북부지역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파키스탄 강진 현장을 가다/ 고찬유 기자 최대 피해 북부지역

입력
2005.10.12 00:00
0 0

“진짜 재앙은 살아남은 것이다.”

할 말을 잃었다. 죽은 자는 혼이 떠났고 살아남은 자는 넋이 나갔다. 12일 낮12시(한국시각 오후4시)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빠져 나와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지 2시간. 눈 앞에 처절한 생지옥이 펼쳐졌다. 도로는 산 사태로 곳곳이 끊긴 데다 피난민들이 뒤엉켜 있다.

사람들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진이 또 온다”는 공포가 이들의 등을 떠밀고 있다. 주택의 70%가 파괴된 만세라에서 왔다는 자린(42)씨는 “이슬라마바드, 이슬라마바드!”를 외쳤다. 그 쪽 상황을 물었지만 대답은 “디제스터(Disaster)”뿐이었다. 맨발에 맨몸으로 땅의 저주를 피해온 사람들은 오로지 “워터(물)” “블랭킷(담요)”을 원했다.

길이 끊기고 통신이 두절돼 ‘고립된 뭍’으로 변한 발라코트의 상황을 전해주는 목소리는 더욱 처절했다. 6명의 식구를 잃은 시타씨는 “모든 것이 몇 초 만에 파괴됐다”고 절규했다.

현지 언론은 발라코트에서 적어도 1,000명의 학생이 생매장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피난민들은 “땅 속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알라가 그들에게 허락한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있다”고 호소했다.

거대한 피난행렬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기자와 한국구조팀은 마치 격류를 거슬러 헤엄을 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12일 오후4시. 드디어 이슬라마바드 북서쪽 135㎞ 지점인 아보타바드에 닿았다.

도시는 깊은 침묵에 쌓여 있다. 전날 마른 벼락 뒤에 쏟아진 폭우는 악몽의 도시에 통곡의 비가(悲歌)를 뿌려대고 있었다. 구조작업은 지연되고 있었다. 비를 피할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은 넋을 놓고 빗속에 주저앉아 있었다.

도시 외곽에 옹기종기 터를 잡은 마을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주택의 윤곽마저 그려볼 수 없었다. 피에 젖은 옷가지들, 깨진 그릇, 식사메뉴를 적은 수첩 조각, 일그러진 가족사진, 인형과 크레용 등 비에 젖고 눈물에 젖은 문명의 잔해만이 널려 있었다.

하지만 진짜 재앙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보금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밤마다 엄습하는 추위와 싸우고 있다. 고원의 매서운 바람이 기온을 영하까지 떨어뜨리고 있지만 속수무책이다.

피난 지역 곳곳에서는 추위를 이기지 못한 주민들이 주유소에 들어가 기름을 훔치고 있다. 구호차량이 도착하면 피난민들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구호품을 챙겨 들고 사라진다. 심지어 경찰서에서 식량과 텐트가 털리고, 군부대가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집이 있거나 집터가 남은 주민들조차 여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시신 발굴작업과 구호활동이 늦어지면서 전염병 발발 공포도 스며들고 있다. 카슈미르의 산악지대에는 폐허가 된 마을들이 나흘째 고립돼 있다.

폭풍우로 구조헬기 마저 뜨지 못해 민심은 최악에 달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외국 구조팀의 손길도 아직 북부 오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들 지역에선 지진으로 강이 오염되면서 식수마저 구할 수 없는 형편이다. 물로 인한 풍토병뿐 아니라 말라리아 발병까지 예상되고 있다.

현지 주민은 말했다. “이곳은 문명이 멸했습니다. 선사시대가 찾아온 거죠. 우리는 불 피우는 법부터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인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아보타바드(파키스탄)=고찬유기자 jutdae@hk.co.kr

■ 한국구조팀 아보타바드에 “생존자 파악 가장 시급”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그린닥터스 등 한국 구조 팀 27명이 12일 오후4시(한국시각 오후8시) 아보타바드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했다. 구조 팀은 한국구조연합회 등 구호인력 12명과 의료진 12명(그린닥터스 11명, KOICA 1명), KOICA 행정지원 인력 등으로 꾸려져 있다.

구조 팀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피해가 극심한 만세라 지역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구조 팀은 우선 생존자가 매몰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현지 주민들을 접촉했다.

생존자 수색 및 방역은 한국구조연합회가 맡았다. 지난해 이란 대지진과 지난해 말 동남아 지진해일(쓰나미) 피해현장에서 구호활동을 벌인 베테랑들의 모임이다. 연합회의 최응수 본부장은 “생존자 파악이 가장 시급하다”고 말한 뒤 “전염병 창궐이 예상되는 만큼 일단 방역부터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의료진 역시 분주하다. 한양대 보건의료연구소 한동운(예방학 교수) 소장은 “당장이라도 도와주고 싶지만 현지 사정이 너무 열악해 우선 피해 지역에 어떤 의료 수요가 있는 지부터 확인해야 한다”며 “파키스탄 정부뿐 아니라 외국에서 파견된 의료팀과 상의해 어떤 역할을 맡을지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과 종교단체 등으로 구성된 자원봉사단도 속속 파키스탄으로 입국하고 있다. 12일 오전엔 굿네이버스와 기자단 10여명이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했다. 전날 오전 도착한 ‘선한 사람들’은 무자파라하드로 떠났으나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기도 했다.

아브타바드(파키스탄)=고찬유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