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검찰의 구속 의견에도 불구하고 동국대 강정구 교수를 불구속 수사하도록 김종빈 검찰총장을 지휘한 것은 여러모로 적지않은 의미를 갖는다.
먼저 장관이 총장에게 지휘권을 발동한 것은 검찰 사상 처음이다. 천 장관이 이번 조치에 앞서 ‘사상 최초’라는 의미와 그 부담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다. 비록 법이 보장하는 권한이지만 역대 법무장관들이 한번도 행사하지 않은 이유는 수사에 대한 정치적 외압으로 비칠까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담을 감수하고 권한을 행사한 것은 그만큼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천 장관은 불구속 수사의 당위성으로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명시된 인권옹호 및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들었다. 그는 “이러한 원칙은 공안사건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고 여론 등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고 못박았다. 엄정처벌을 주장해온 보수세력의 요구에 정면돌파를 선언하면서 주요 공안사건에 대한 검찰의 구속수사 관행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꾀한 것이다.
이번 조치는 다른 사람이 아닌 천 장관이라서 가능했다는 해석이 많다. 이번 사건과 비슷한 논란을 일으켰던 송두율 교수 사건에 대해 당시 강금실 법무장관은 “송씨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 하더라도 처벌할 수 있겠느냐”는 의견을 밝혔지만 지휘권 발동을 통해 검찰의 구속 방침을 뒤집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 장관은 11일 국정감사 답변을 통해 “강 교수 사건에 대한 검찰 보고가 올라오면 지휘하겠다”고 밝혔고 실제 12일 지휘권을 발동했다.
강 전 장관과 천 장관은 모두 비검찰 출신이지만 평소 뚜렷한 소신을 밝혀온 천 장관의 정치인으로서의 성향이 많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공식 입장은 밝히지 않았지만 그 동안 청와대와 여권 곳곳에서 “강 교수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학문적 견해에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여러 차례 표명됐다는 점에서 천 장관의 이번 조치는 노무현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선 검사들은 이날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 소식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대부분 “전례가 없어 당혹스럽다”며 반응을 자제했지만 찬반 의견이 다양하게 흘러나왔다.
수사를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공안부 검사는 “수사를 대강 하라는 말이냐. 한마디로 참담하다”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또 다른 검사는 “수사는 총장을 정점으로 하는 것이 맞다. 가능한 한 장관이 구체적 지휘는 안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한 부장검사는 “서면으로 지휘했다는 것은 자신 있다는 것 아니냐. 결과에 대해 장관이 책임지겠다는 것인데 검찰로서는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검사는 “신선한 일이다. 그 만큼 검찰 수사가 투명해진 것 아니냐”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관심은 김 총장의 향후 대응에 쏠리고 있다. 장관의 지휘내용이 대검의 의견에 대한 강제조치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대검 관계자는 “이례적으로 서면 지휘한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김 총장은 이날 저녁 대검 관계자를 통해 기자들이 소감을 묻자 “묵묵부답이라고 대답하라”고 밝혔다. 어딘가 불쾌감이 묻어나는 반응이다.
현행법은 구체적 사건에 대해 장관이 총장만을 지휘ㆍ감독한다고만 규정하고 있을 뿐 총장이 이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규정은 없다. 다만 장관의 지휘를 총장이 수용하지 않을 경우 용퇴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어 향후 김 총장의 대응이 주목된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강교수 주장' 전문가 평가
한국전쟁 전문 연구자들은 강정구 교수의 주장들이 학술적 엄밀성과 균형성을 잃고 정치적ㆍ도덕적 신념에 의지한 편향된 시각이라고 지적했다.
▲ 류길재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 "학문과 관계없는 정치적 발언"
“한국전쟁에 대한 강 교수의 해석은 비변증법적이고, 몰역사적이다. ‘한국전쟁은 통일전쟁’이라는 주장은 학문적으로 가능한 얘기지만 그가 통일전쟁이라는 용어를 학문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닌 듯 하다.
강 교수는 한국전쟁이 민족간의 통일전쟁이었으므로 옳았고, 미국의 전쟁개입은 나빴다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 전쟁을 그 의도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학자로서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에서 보듯 대부분의 전쟁은 내전으로 시작해 국제전이 되는 경향을 보인다. 내전과 국제전을 잘라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이해다.
‘맥아더는 전쟁광이자 살인자’라는 발언은 명확한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팩트(fact)’가 아니다. 이런 주장은 학문적 발언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발언에 가깝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적화 통일 되었을 것’이라는 말 역시 학문과는 관계없는 추론으로 학자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지 못한 표현들이다. 강 교수는 역사를 도덕적으로 판단ㆍ재단하고 있으며, 이것은 학자의 몫이 아니다.”강교수는 학문의 자유를 남용했지만 사법처리는 바람직하지 않다.
문준모기자 moonjm@hk.co.kr
▲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한국전쟁의 국제적 측면 무시
“‘미국이 ~했다면’, ‘전쟁에서 ~했다면’ 등의 가정으로 이루어진 강 교수의 주장은 역사학에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사용되는 반(反)사실적ㆍ가상적 해석(counterfactual analysis)에 근거해 있다.
물론 자연과학과 달리 역사는 가정에 근거해 논리 전개를 하는 연구방법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강 교수는 가상적 추론의 경우 그 결과에 대한 경우의 수가 굉장히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논리 전개에 사용했다. 이것은 이론적ㆍ학문적으로 문제가 있다.
한국전쟁 자체가 미국 소련 등 열강의 국제전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것을 ‘통일전쟁이다’ ‘내전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전쟁 전체의 국제적 성격을 무시하는 잘못된 시각이다.
한국전쟁의 실상 전체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게 있어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전쟁인 동시에 스탈린의 전쟁이었고, 미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 교수는 이런 국제적인 측면은 모두 빼놓은 채 가정에 근거해 한국전쟁의 국내적 성격만 강조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 시민단체 반응
진보·보수 단체들은 천정배 법무장관의 불구속 수사 지휘에 대해서도 큰 입장차를 드러냈다.
진보 측은 환영하면서도 사법처리 자체에 불만을 나타냈다. 참여연대 박근용 사법감시센터 팀장은 “구속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므로 불구속 수사 지휘를 내린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불구속 수사뿐 아니라 단순한 개인적 발언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국보법폐지국민연대 김성란 사무총장은 “최근 수사기관이 국보법 위반 사건에 대해 불구속 수사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며 “천 장관이 이러한 원칙을 지키려는 태도를 보여 다행”이라고 말했다.
보수 측은 일제히 반발했다. 22개 보수단체와 연대해 강 교수를 경찰에 고발했던 나라사랑시민연대 김경선 대표는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노골적인 친북 행위를 한 강 교수를 불구속 수사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며 “앞으로 국가안보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윤창현 사무총장은 “강 교수의 칼럼은 대한민국 자체가 잘못 태어났다는 해석이 가능할 정도로 위험한 발언”이라며 “정부가 이 사안을 얼마나 경미하게 다루는지를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자유시민연대 김구부 사무총장은 “법무장관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이처럼 중요한 사건을 혼자 결정할 수 있느냐. 정부 여당이 여론과 국민 감정을 등에 업고 정책을 결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여론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느냐”고 성토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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