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극장가에 사랑을 주제로 한 한국 영화 세 편 ‘너는 내 운명’ ‘사랑니’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 나란히 걸렸다. 굳이 장르를 보자면 멜로지만, 각 감독의 독특한 개성과 연출 세계가 자유롭게 분화된 작품들이다.
짧게는 3년, 길게는 6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이들 세 영화의 감독은 데뷔작으로 뭇시선을 사로잡았고, 이번이 두 번째 작품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를 뛰어넘어 한국영화의 새 지형을 그려가는 세 감독의 얘기를 들어보았다.
■ "통속적인 현실이 가장 감동적 소재"
너는 내 운명-박진표 감독
박진표(39) 감독은 데뷔작 ‘죽어도 좋아’ 때부터 “영화가 좀 쎄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침대장면을 7분 동안 고스란히 담아냈고, 인권 옴니버스 영화 ‘여섯 개의 시선’에서는 유창한 영어발음을 위해 아이의 혀를 잘라내는 수술 현장을 여과없이 보여주었다. “믿지 않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관객들이 영화에 동화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다.
전작과 달리 ‘너는 내 운명’에서는 시신경을 불편하게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의 진실을 우직하게 몰아붙이는 연출은 여전하다. 방송국 다큐멘터리 PD 10년의 이력에서 비롯된 “가짜를 용서하지 못하는 눈” 때문일 것이다.
“다큐멘터리 활동경험이 상상력을 제어하는 단점으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제가 방송을 하며 만난 수많은 사람과 사연들은 가슴 속에 응어리지고 정화되어 커다란 재산이 되었습니다. 그 재산에서 제 영화의 소재가 나옵니다.”
박 감독은 ‘너는 내 운명’이 사랑 지상주의라는 일부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다. “농촌 총각 석중과 다방레지 은하의 사랑은 대단히 평범한, 통속적인 이야기인데 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사람들이 사랑 지상주의 편견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통속이 마음이고 마음이 통속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라고 말하는 것이 제 영화입니다. 에이즈라는 쉽지 않은 소재에 쉽지 않은 이야기를 관객들이 많이 봐줘 고마울 따름입니다.”
서른 여섯 적지 않은 나이에 영화 판에 뛰어든 박 감독은 “방송과 달리 주관적인”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사람들의 자연스런 이야기 속에 사회의 이면과 사랑을 담아 낼 차기작의 내용은 아직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의 머리 속에서 한창 촬영 중이다.
■ "6년간 공백으로 내면 더 충실해져"
사랑니- 정지우 감독
‘해피엔드’로 데뷔한 지 6년 만에 신작을 만든 정지우(37) 감독. 신인답지 않은 촘촘한 연출 솜씨로 충무로 차세대 기대주로 주목 받은 감독치고는 그 행보가 지나치게 느리게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는 두 번째 작품을 위해 쉼 없이 뛰어왔다.
정 감독은 만화 원작을 새롭게 재구성한 ‘두 사람이다’에 2년6개월을 쏟아 부었으나 예산과 캐스팅 등 여건이 맞지 않아 제작 계획을 접었다. 이후 2003년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에 낙선한 공미정의 ‘같은 자세’를 골라내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입힌 ‘사랑니’를 내놓았다.
관객과 ‘업계’로부터 잊혀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압도했을 만도 한데, “조바심 낸다고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편안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
하지만 “근육을 안 쓰면 퇴화하듯 오랜 시간 영화현장을 떠나 있다 보니 촬영 초반엔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도 현장과 멀어져 있던 동안 읽고 보고 들은 것이 내면에 쌓여 눈에 잘 띄지 않는 부분에서 힘을 발휘했어요.”
‘현실과 판타지가 맞닿고,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경계를 넘나드는 ‘사랑니’의 세밀한 이음매는 결국 6년간의 숙성에서 비롯된 셈이다.
평단의 호평과는 반대로 ‘사랑니’의 흥행 성적은 신통치 않다. 그러나 그는 “연출적으로 대중과 교감할 수 있는 사항을 치명적으로 놓치고 있진 않다”고 말한다. 단지 영화적 새로움을 경험하려는 관객과 만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정 감독은 오래 전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이지형의 소설 ‘망하거나 죽지않고 살 수 있겠니’를 다음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려움은 많겠지만 내년 여름쯤 촬영에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 "관객의 인식의 지평 넓히는게 내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민규동 감독
민규동(35) 감독도 정지우 감독처럼 데뷔작 ‘여고괴담2’ 이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만들기까지 6년을 보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며 2년간 영화 보는 재미에 푹 빠졌고, 1년6개월 동안 야심차게 준비한 이국적 멜로 ‘솔롱고스’ 제작이 좌절됐다. “장르영화 속에서 내 길을 찾아 보자”며 6개월을 투자한 ‘특별한 사랑??뒷날을 기약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영화 제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영화는 세계관의 연장이자 소통 수단이며 감독이 사유하는 이미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준비했던 영화들이 벽에 부딪히면서 영화는 결국 제작자의 의지와 관객의 욕구에 따른다는 평범한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를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다.
“여러 에피소드가 차별성을 가지면서 하나의 구조로 보이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이야기들의 단순 나열이 아닌 논리적 맥락을 지닌 리듬감 있는 영화가 되도록 신경을 기울였지요.” 워낙 일정 맞추기가 쉽지않은 유명 배우들이 여럿 출연하는 바람에 연출 리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고 했다.
민 감독은 아직 상업적 코드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저 자기가 재미있어 하고 감동 받는 이야기라면 다른 사람도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만갖고 있을 뿐이다. 흥행에 대한 욕심도 없다. “제가 만든 영화가 조금이라도 시대를 앞서가고 관객들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는 ‘솔롱고스’든 ‘특별한 사랑’이든 다음 영화도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 서있을 것이라고 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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