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호를 넘긴 우리나라 국보(國寶) 목록을 살피다 보면 의아한 대목이 눈에 띈다. 일련번호에서 274호가 빠져 있다. 10여년 전 문화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 때문이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1992년 여름 해군사관학교의 충무공 해전유물 발굴단이 당시 문화재관리국에 쾌거를 전했다. 경남 앞바다에서 임란 때 거북선에 탑재된 포를 인양했다는 것이었다. 학계도, 언론도 흥분했다. ‘귀함별황자총통(龜艦別黃字銃筒)’으로 명명된 이 유물은 당대 내노라하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문화재위원회의 만장일치 결정으로 국보 제274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4년 뒤 이 것은 시중 고철가게에서 사들인 정체불명의 철물로 드러났다. 검찰 수사로 이 같은 사실이 밝혀지자 심의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은 “보통 거북선을 귀선(龜船)이라고 했는데 귀함이라고 쓴 것부터 이상했다” “어쩐지 너무 선명한 글자가 마음에 걸렸다”는 등의 때늦은 변명을 쏟아냈다. 당연히 국보지정은 취소됐다. 이게 국보 274호가 영구결번(스포츠에서라면 대단한 영광인)이 된 사연이다.
온 국민이 관심 갖는 국보 감정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대개는 ‘그들끼리’ 거래되는 미술품이야. 더욱이 감정이란 것이 그렇게 무 자르듯 결론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위작범이 자백하면 모를까 대개는 개연성을 판단하는 일이다. 그러니 이번 검찰 판정도 ‘위작이다’가 아니라 ‘위작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가 정확한 해석이다. 실제로 예전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논란 때는 화가 스스로 “내가 그리지 않았다”고 했음에도 화랑협회 감정위원회가 진품 결론을 내리는 바람에 상처를 입은 천 화백이 화필을 놓아버린 일도 있었다.
이번 위작 사건을 계기로 체계적인 감정가 양성과 공인감정기구의 설립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 또한 위작 유통을 최소화하는 대안일 뿐이다.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이 권위있는 다수의 감정기관들을 갖고 있으나 숱한 위작들이 세계미술시장에 간단없이 출현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심지어 고흐의 명작 ‘해바라기’처럼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조차 위작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위작의 동기야 물론 돈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이 상품으로 소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더러, 세계적으로 미술품은 가장 수익성 높은 투자종목으로 꼽힌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미술작품 거래는 투자보다는 투기 양상과 닮아있다. 부동산이나 주식시장에서와 같은 ‘쏠림’과 ‘묻지마 투자’ 현상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여기서는 철저하게 소수의 ‘승자 독식’ 원칙이 적용된다. 작품성에 관계없이 그저 특정작가의 이름이 붙기만 하면 천정부지로 값이 치솟는다. 유독 이중섭과 박수근의 위작이 대량 유통되는 이유다.
생각해 보라. 이번에 위작으로 판정된 이중섭의 고작 엽서 두장 크기 소품이 3억원이 넘는 값에 거래됐음을. 여기엔 솔직히 이들 화가의 가치를 대책 없이 띄운 미술계의 책임도 크다. 이번 사건으로 어쩔 수 없이 새삼 확인하게 되는 건 우리 문화소비의 일천한 수준이다.
그렇다고 한줌 미술품 투기꾼들의 행태로 다들 기죽을 일은 아니다. 어차피 예술작품의 가치는 향유하는 이의 것이므로. 캘린더에서 오려낸 그림에서라도 아름다움과 영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의 가치를 장롱 속 채권 같은, 더구나 위작인지 불안한 유명작가의 그림에다 비할까.
이준희 문화부장 jun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