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우리집 농사일을 도맡아 하던 아저씨가 있었다. 대관령 서쪽 산밑에서 자란 그 아저씨는 여남은 살 때 집안 어른을 따라 대관령 동쪽 산 밑에 있는 우리집으로 왔다. 처음엔 꼴머슴으로 들어왔지만 스무 살 안팎의 장정으로 성장한 다음엔 마을에서 가장 힘센 일꾼이 되었다.
사람은 순하고 어진데 아저씨는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어 글씨를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다. 아는 것은 오직 아저씨 이름 석자뿐이었다. 그런 아저씨가 할아버지와 내게 글씨를 배웠다.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글씨는 ‘금초’였다. 여름이면 소를 키우는 집마다 자기 집 논둑의 꼴을 베어가지 말라는 뜻으로 ‘금초’라고 쓴 우리 팔뚝 길이만한 팻말을 박았다. 그리고 내게 배운 글씨는 한 동네에 사는 어떤 누나의 이름이었다.
그걸 배운 다음날부터 아저씨는 일을 하러 가는 곳 아무 길바닥에나 낫과 호미로 삐뚤빼뚤 ‘아저씨 그 누나 금초’라고 썼다. 그것밖에 글씨를 모르는 아저씨로선 자신이 그 누나를 많이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그것 때문에 그 누나는 전보다 더 찬바람 나게 아저씨를 대했다. 이제 연세도 제법 되셨을 텐데 어디 살고 계실까, 그 아저씨.
소설가 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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