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태조 주원장. 평민 출신으로 제왕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훗날 청 세조 때, 군신들이 모여 중국의 역대 황제를 품평하는 자리에서 한 고조, 당 태종 같은 쟁쟁한 임금을 제치고 최고의 제왕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비천한 출신이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조실부모하고 유리걸식하다가 탁발승이 되었고 산적에 합류하였던 전력 때문이다. 그의 내심 깊은 곳엔 비참하고 핍박받던 유년기의 체험이 응어리져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집안 좋고 학식 있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대권을 잡기 전까지 그는 관대한 지도자였다.
황제가 되고 모든 것이 변했다. 즉위 후, 한 신하가 올린 글에 광(光)이라는 글자가 있었는데 자신이 탁발승이었던 것을 비꼰 것이라 하여 처형했다.
또한 비슷한 처지에서 동지로 만나 호형호제하던 인물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재위 중 개국 공신들을 다 숙청했다. 어떤 반역사건은 연루되어 죽은 자가 3만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렇듯 끝없는 의심과 불안에 쫓겨 무자비한 살육을 일삼은 어두운 면이 그의 인생 후반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주원장에게도 평생을 존경하고 예우하던 지식인이 하나 있었다. 바로 유기(劉基)이다. 대개 창업 군주에게는 참모가 하나쯤 있기 마련인데, 유명한 장량, 제갈량보다 낫다는 평을 듣는 사람이다.
그는 원나라 과거에 장원으로 뽑힌 수재인데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라 천문과 병법까지 능통한 학자로 그의 이름을 칭탁한 예언서가 당시부터 나돌 정도였다. 아울러 명예나 부귀에는 관심이 없는 고결한 성품까지 갖추어 지금까지 민간에서 숭배하고 있다.
1363년의 일이다. 주원장은 통일에 방해가 되는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친히 원정에 오른다. 당연히 유기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자 유기는 불필요하고 위험하다고 말렸다.
이런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정한 주원장은 대승을 거두고 개선한다. 이쯤 되면 한마디 뻐길 만도 한데 주원장은 유기에게 다음같이 말한다. “당신 말이 맞아. 정말 가면 안 되는 전투였소. 만약 누가 후방에서 공격해 왔다면 큰일이 날 뻔했어.” 주원장이 제왕이 될 수 있었던 남다른 점이 엿보이는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요즘 나라 전체가 안팎으로 회의도 많고 말들도 많다. 서로 네 탓하는 높은 분들을 보며 주원장과 같이 공을 세우면서도 반대자를 존중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이라 해야 할지.
박성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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