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국일보 문학상 예심 심사평] (2)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국일보 문학상 예심 심사평] (2)

입력
2005.10.11 00:00
0 0

■ 세상은 의지와 상관없는 비극?

박성원 '인타라망-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5'

박성원의 ‘인타라망-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5’는 하이퍼텍스트의 문법처럼 재구성되는 기억을 통해서, 인간관계의 무도덕성(amoral)을 섬뜩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69일 동안 의식불명인 어느 사내가 있다. 그는 눈 오는 날 차를 몰다가 사고를 냈고, 일가족 살인 사건의 현장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69일 동안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병실을 지킨 한 남자가 있다.

살해된 가족의 장남인 그는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남자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의식불명이었던 사내가 깨어난 후, 기억의 단편들이 제 자리를 찾으면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사내는 범죄자로 몰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했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생존자가 있는데도 집에 불을 질렀다는 것.

어떠한 죄도 짓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범죄를 저질러야 했던 ‘상황의 아이러니’가 치밀한 묘사와 구성을 통해서 제시된다. 그렇다면 ‘인타라망’(因陀羅網)이란 무엇인가. 거칠게 번역하자면 비스듬한 인과의 연쇄로 이루어진 그물이며, 작품에 의하자면 한 사람의 웃음이 다른 사람의 피눈물이 되는 세계를 말한다.

또한 비극적인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조어(造語)이자, 작품의 구성 원리를 드러내는 메타포이기도 하다. 주체의 의지와 세계의 논리가 서로 어긋나면서 생겨나는 아이러니의 스펙트럼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아마도 비극적 세계관을 작품의 구성원리로 치환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에서 말미암은 문학적 소산일 것이다.

■ 시각의 지배… 상상력 행방불명

김중혁 '무용지물 박물관'

김중혁의 ‘무용지물 박물관’에는 2004년 월드시리즈에서 보스턴 레드삭스가 우승하던 장면을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듣고 보았던 두 사람이 등장한다. 소규모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나’는 텔레비전으로 보았다. 반면에 인터넷에서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라디오 방송을 하는 ‘메이비’는 라디오로 그 장면을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텔레비전으로 보았던 ‘나’가 보스턴이 극적으로 승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정도라면, 라디오로 방송을 들었던 ‘메이비’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때의 상황을 재현해 낸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텔레비전으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의 시각중심적 문화는 언제나 과도하게 완성된 이미지를 우리에게 부여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우리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영화 ‘매트릭스’의 카피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의 시각문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선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라디오가 상징하는 구술(口述)적이고 청각적인 문화에는 그 어떤 생산적인 여백이 존재하며,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은 여백을 스스로 채워가면서 의미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

이 작은 에피소드에는 시각 중심의 문화가 놓치고 있는 것, 더 나아가 청각-구술적 상상력의 고유한 위상이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무용지물 박물관’은 시각적 이미지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문학적 상상력의 행방을 묻고 있는 작품으로도 읽을 수 있다. 언어(말과 문자)와 상상력의 현대적 위상과 의미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는 작가의 감수성이 무엇보다도 돋보인다.

■ 근원적 상처에 대한 즐거운 치료법

김애란 '달려라 아비'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상상하는 딸의 이야기이다. 출생 자체가 축복이 아니라 상처가 될 수밖에 없는 사생아 이야기인 셈이다.

가족 특히 아버지가 정신적 상처(Trauma)의 기원으로 작동하는 소설을 그 동안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하지만 작가의 발상법은 아버지와 관련된 전통적인 서사문법을 유머러스하게 비켜나간다.

달리 말하면 도망간 아버지를 정신적 상처의 기원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 대신에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도망간 아버지를 독특한 방식으로 긍정한다. 나라는 존재를 가능하게 한 생물학적인 기원이 아니라, 나의 억압된 무의식으로부터 연유하는 일종의 징후로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것이다. 생물학적 기원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무의식과 관련된 징후로서의 아버지. 이를 두고 아버지와 관련된 새로운 발상법의 출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줄곧 부정하던 아버지를 임종과 함께 긍정하게 되는 플롯도 아니고, 아버지에 대한 저항의 포즈로 윤리적 거점을 마련하는 서사전략도 아니다. ‘달려라 아비’에서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긍정된다.

그리고 아버지를 긍정하는 자신을 긍정한다. 아버지에 대한 이중의 긍정. 아버지와 관련된 두 번의 긍정이 정신적 상처를 만들지 않으려는 즐거운 의지로 나타나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무의식에 대한 자기배려로 나타났던 것이리라. 정신적 상처의 기원(아버지)을 유목(遊牧)시키는 독특한 상상력 속에서 한국문학의 새로움을 즐겁게 훔쳐본다.

문학평론가 김동식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