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제2의 고향입니다. 얼마남지 않은 삶이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입양보내기 힘든 장애아들을 돌보고 싶어요.”
11일 오전 경기 고양시 일산구 탄현동 일산복지타운.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 말리 홀트(70ㆍ여)씨는 “하루하루 입양아들과 장애인들을 보살피는데 신경을 쓰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라며 미소를 지었다.
설립자인 홀트 부부의 딸인 말리씨는 50년을 입양아들과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해 온 홀트아동복지회의 산 증인. 아버지 해리 홀트(1964년 사망)씨와 어머니 버다 홀트(2000년 사망)씨가 떠나간 뒤에도 홀트아동복지회를 이끌고 있다. 칠순의 나이지만 지금도 일산복지타운에서 생활하면서 장애 때문에 입양이 불가능한 장애인 등 270여명을 직접 보살피고 있다.
말리씨가 입양과 인연을 맺은 건 부모가 1955년 10월 12일 한국전쟁으로 고아가 된 12명을 미국 가정에 입양시키면서부터. 이 중 8명은 말리씨의 동생이 됐다. 홀트 부부는 우연히 한국전쟁의 참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뒤 굶주림과 질병으로 꺼져가는 생명의 일부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입양을 결심했다.
당시 미국에서조차 입양이 생소했던 터라 ‘국경을 넘은 입양’은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 됐고, 미국인들도 전쟁고아 입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말리씨는 “언론을 통해 입양소식이 전해지자 자신들도 입양하고 싶다는 전화가 수백통이나 걸려와 부모님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홀트 부부는 이를 계기로 이듬해인 1956년 직접 한국에 와서 서울 효창공원 인근에 임시 보호소를 만들고 전쟁고아들의 해외입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말리씨도 같은 해 미국서 간호대학을 졸업한 뒤 부모와 함께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도움을 청한 데다 자신 또한 입양 일을 평생의 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보살필 의료진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자신의 몸도 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쁜 것은 오히려 견딜 만 했다. 입양을 바라보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부담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악몽으로 기억된다. 정부는 ‘고아 수출국’이라는 비난을 우려해 해외입양 금지령을 내렸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조치였지만 홀트아동복지회 존립 자체가 흔들렸다. 늘어나는 입양희망아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정부가 슬그머니 금지령을 취소한 것은 다행이었다.
홀트아동복지회가 50년 동안 국내외에 입양을 보낸 아이는 모두 9만5,574명. 해외로는 미국 프랑스 벨기에 등 대부분 입양아들의 성장 환경이 좋은 선진국에 보냈다. 초창기에는 혼혈아와 전쟁고아가 대다수였지만 요즘은 미혼부모 아이들이 많다.
앞으로의 과제는 국내 입양을 보다 활성화하는 것. 국내입양은 1957년 1명을 시작으로 1979년 1,116명으로 최고에 이른 뒤 점차 줄고 있다. 현재는 연 500여명 정도. 말리씨는 “인식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한국인들은 아직까지 순혈주의에 빠져 입양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며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낳은 부모나 기르는 부모나 모두 똑같다”고 말했다
안형영 기자 prometheus@hk.co.kr
■ 50여명 '특별한 손님' 돼 한국 왔다
홀트아동복지회 50주년 기념식 참석자 가운데는 특별한 손님이 많다.
1955년 홀트아동복지회 설립자인 해리 홀트씨가 직접 입양한 전쟁 고아 8명 중 5명을 포함해 50여 명의 해외입양아들이 홀트아동복지회 5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로버트, 베티, 폴, 메리, 조지프, 크리스틴, 헬렌, 나대니얼 등으로 이름이 붙여진 8명의 전쟁고아는 홀트가(家)에 입양돼 55년 10월 12일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우리나라 첫 해외입양이었다. 대부분 혼혈로, 출국 당시 3~7살에 불과했던 이들은 이제 어엿한 사회인으로 행복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오레곤주 유진시에서 자동차 매매상으로 일하고 있는 로버트 홀트(52)씨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내가 성장할 수 있었듯이, 이제 내가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작으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조지프씨와 나대니얼씨는 이미 세상을 떴고, 폴씨는 몸이 아파 이번 방한에 동행하지 못했다.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 한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됐던 황문숙(21ㆍ여ㆍ미국명 카렌 존슨)씨는 복음성가 가수가 돼 한국에 돌아왔다. 1985년 버스기사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던 친아버지는 궁핍한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그 해 겨울 두돌이 갓 지난 눈먼 둘째 딸을 미국으로 보냈다. 앞을 보지 못해 양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황씨는 대신 천부적인 음악 재능을 보였다.
5살 때부터 클라리넷, 프루트를 스스로 터득하고 10대의 나이에 16곡의 노래를 작곡했다. 황씨는 9월 홀트아동복지회의 도움으로 친부모를 찾기도 했다. 그는 “지난 시간들은 모두 내게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앞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에 작으나마 위안을 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1962년 홀트 일산복지센터 정문에 버려진 소아마비 고아 조명수(49ㆍ미국명 스티브 스털링)씨는 미국에서 마케팅 전문가가 돼 돌아왔다. “40여년 전 비좁은 방에서 20여 명이 함께 잠을 자고, 미군 병원에서 처음 다리수술을 받던 때가 생각난다”는 조씨는 “버려진 아이들에게는 제가 받은 것과 같은 도움이 꼭 필요하다”며 입양 대상 아동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다.
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미국으로 입양, 상원의원까지 오른 신호범(70ㆍ미국명 폴 신)씨도 왔다. 고아로 미군부대 하우스보이 생활을 하던 그는 1953년 18살의 나이에 미국에 입양돼 펜실베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98년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신씨는 “내가 받은 은혜만큼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며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홀트아동복지회 관계자는 “1,000여 명의 국내외 입양가족 등이 50주년을 함께 해 의미가 남다르다”며 “앞으로는 이들의 가정을 지켜줄 수 있는 복지회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 "생부모가 입양아 데려가면…" 기우
“입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몰라서 생기는 겁니다. ”
입양 전문가들은 입양을 생각하는 부모들에게 우선 입양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여러 입양 전문기관이 실시하는 입양교육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입양촉진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 시행규칙은 양부모의 조건을 ‘만25세 이상으로서 양자와의 연령차이가 50세 미만이며, 자녀의 수가 입양 아동을 포함해 5명 이내, 혼인 중일 것’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입양에 합의한 부부는 주민등록등본, 호적등본, 부부건강진단서를 준비해 입양기관에 상담을 신청하면 입양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입양 수수료는 국가보조금 유무와 입양 전 양육형태에 따라 무료부터 수백만원까지 다양하다. 수수료가 200만원인 홀트아동복지회의 경우 거의 모든 아기를 일반 가정에 위탁해 돌보다가 입양시킨다.
입양아는 중ㆍ고교 수업료 및 입학금 면제, 의료급여 지급 등의 혜택을 받는다. 인천시는 작년부터 시민이 입양할 경우 만3세까지 월 양육비 20만원을 지원하고, 과천시는 월 5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입양 부모들의 가장 많은 염려는 어느 날 생부모가 찾아와 아이를 데려가지 않을까 하는 것. 홀트아동복지회 국내입양 담당자는 “입양기관에서 철저히 비밀보장을 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생기기 어렵다”며 “만약의 경우라도 법적으로 정당한 절차를 진행했으므로 충분히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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