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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30) 서울대 농생명공학부 교수 부경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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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30) 서울대 농생명공학부 교수 부경생

입력
2005.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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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주도 서귀포의 작은 마을에서 12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에는 소와 말이 수백 마리가 있었고 귤밭도 가져서 넉넉한 살림이었다.

나보다 한참 위인 큰 형님과 작은 형님은 일찍이 일본 유학까지도 다녀왔다. 나보다 한 살 위인 넷째 형님까지도 제주시로 유학을 보냈다. 당시만 해도 서귀포에서 제주시는 차로도 다섯 시간은 걸리는 먼 길이었으니 유학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1948년 4ㆍ3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집의 살림은 크게 기울었다. 위로 두 형님은 인천으로 피난을 간 덕분에 사상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은 없었으나 소와 말이 징발되고 모든 오름이 입산금지가 되면서 남아있던 소와 말도 키울 길이 막연해졌고 결국에는 대부분 잃고 말았다.

일본으로 유학간 맏형이 광복이 되고서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여 앓기 시작한 아버님이 이 무렵 돌아가시기까지 하니 어머님 혼자 여러 형제를 키우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어머님과 누님은 일하러 나가고 형님들은 공부하러 가면 소먹이는 일과 밥 짓는 일은 내 차지였다. 그 때는 짚을 때서 밥을 지었는데 짚불의 불티가 튀어서 지금도 내 눈에는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지금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그 때는 맘껏 먹어본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꿈이었다. 이럴 정도이니 내 차례에는 대학을 갈 형편이 못되었다.

서귀포농고를 졸업할 무렵 나는 공부를 더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학교 선생님이라도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이 절박했다.

하지만 바로 위에 형이 학비가 들지 않는 육사에 응시했다가 떨어져서 돌아오면서 수험생이 한 집에 2명이나 되었다. 우리 집안 형편에 한꺼번에 두 사람을 대학에 보내기는 힘들다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공부를 더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작은 골방에 틀어 박혀 밤과 낮을 보내면서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 할 수 있을까만을 궁리했다.

공부를 해서 나도 인류를 위해 공헌을 하고 싶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고 싶었다. 어쨌든 농고를 나와 농사를 짓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보낸 후 나는 용기를 내어 일선 부대에 계신 둘째 형님께 공부를 하고 싶은 나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둘째 형님은 한국전쟁 때 군에 들어가셔서 그 때는 중령이었으니 형만 조금 도와준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다행히 형은 대학을 가면 지원을 해주겠다고 답장을 주셨고 서울로 시험치러 오던 때에 맞춰 미리 학교를 알아봐 주시기도 했다. 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당시만 해도 의대보다도 농대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내가 농대를 선택한 것은 나이 드신 어머님과 귤밭을 돌보면서 품종개량을 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농생물과가 그런 일을 하는 곳인 줄 알고 입학을 해놓고 보니 품종개량은 원예학과가 전공이었다. 그렇다고 크게 좌절할 정도로 품종개량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병해충에 별 효과는 없는데도 약이 독해서 치는 사람은 고역인 농약에 대해서도 해결방안을 찾고 싶어서 생물학과 화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농생물과에서 현재선 교수님을 만나면서 생물학과 화학에 대한 관심은 곤충과 연결되었고 이어 곤충생리학과 화학생태학 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점점 곤충의 세계로 빠져 들었고 그 곤충들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1960대 말경 개인의 살림은 물론이고 나라 살림도 어려운 때 외국 유학을 간다는 것이 가뭄에 콩 나듯 어려울 때 나는 감히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했고 그 때 곤충학계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미네소타 대학 글렌 리처드 교수의 곤충생리학 연구실에서 연구비를 받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괴팍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분이셨지만 나는 그분으로부터 더 바랄 것 없는 훌륭하고 빈틈없는 연구와 공부하는 법을 배웠다.

그 때 나는 모기의 감각기관에 대한 공부와 연구를 했는데 전자현미경을 이용해야 했다. 전자현미경은 매우 섬세한 세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구이지만 다이아몬드칼이나 유리칼로 조직을 매우 얇게 (100nm 이내) 잘라야 되는 것이 큰 부담이 되어 때로는 하루 종일 실험실에 않아 있어도 쓸만한 절편 하나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어떻게 하면 모기 감각기관의 세포구조를 통하여 그들의 기능을 유추할 수 있는 가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며 연구를 계속했다.

1973년 박사학위를 받고 박사후 과정을 캐나다 토론토 대학과 괼프 대학에서 밟는 동안도 모기 감각기관을 계속 공부했는데 미국과 캐나다의 경제사정이 별로 좋지 않던 때라 연구비가 불시에 끊어지는 수가 종종 일어났다.

그럴 땐 낮에는 연구실, 밤에는 공장에서 밤 새워 일을 하고 새벽에 눈?잠시 붙인 후 다시 연구실로 향하면서 공부와 연구를 계속했다.

그 때 밤에는 과자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졸다 보니 왼쪽 손가락에 통증이 왔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이미 약지와 소지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들어가 있었다.

연구실과 공장일을 반복하면서 잠을 자는 시간이 많이 부족 했던 때문이었다.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았지만 납작하게 된 두 손가락은 끝내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려운 시간들이 흐르고 나는 아프리카의 나이로비에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곤충연구소인 국제곤충생리생태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연구실을 돌아보고 캐나다로 돌아가던 중 들른 조국에서 새로운 연구기관 (인삼연초연구소)을 만들고 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유치하는데 나를 그 연구소의 책임연구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연구와 공부에 대한 욕심에 그 세계적인 곤충생리생태연구소로 가고 싶었고 아내는 엄청난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그 곤충연구소 보다 아이들을 조국에서 키우겠다고 한국행을 고집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978년에 귀국했다.

귀국 4년쯤 후인 1982년도에 나는 그 연구소를 떠나 서울대학으로 자리를 옮겼고 교수와 학자로서 연구와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내가 연구하는 분야는 곤충생리학과 화학생태학으로 그 가운데서도 곤충의 페로몬을 이용한 병충해 예방분야를 전공으로 하고 있다. 곤충은 전세계적으로 100만종이 있어서 생물 종수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그런데 몸이 작기 때문에 이성을 만나기가 힘들다. 매미는 소리를 내고 반딧불이는 불을 밝혀서 이성을 유혹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곤충은 페로몬이라는 체외분비물을 내뿜어 이성을 부른다.

이 같은 곤충의 특성을 활용해서 페로몬 성분으로 곤충을 유혹해서 잡음으로써 실질적인 짝짓기를 막는 방식으로 번식을 줄이는 방재가 가능하다.

서구에서는 일찍부터 이 같은 방재기법을 활용해와 사과나 포도 농사를 지을 때 살충제를 연1회 정도 밖에 뿌리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부터 이 같은 방식을 실험해왔으나 국내 연구가 미진한 실정이라서 곤충의 식생이 비슷한 일본 자료를 활용했는데 내가 현장에 적용해보니 일본과 같은 종이라도 우리나라에 사는 곤충은 페론몬의 화학조성이 달랐다.

그래서 지역에 따라 환경에 따라 같은 종이라도 페로몬의 화학조성이 다르다는 점을 국제학계에 발표했고 다른 나라에서도 이 같은 가설을 검증해보니 지역적 변이성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나의 주장은 유기농업을 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 연구를 하면서도 느낀 것은 가장 지역적인 연구가 가장 세계적인 연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학에 와서 곤충생리학과 화학생태학을 연구하면서 가르치고 또한 시간을 쪼개어 북한 농업과 과학기술용어의 표준화에도 많은 시간을 바치고 있다.

중국과 수교하기 전인 91년부터 서울대학교의 연구소 일원으로 매년 연변지역을 방문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고 그 과정에 북한농업서적을 어렵게 구해 공부를 하게 되었다.

과학기술용어 표준화는 네 가지 주요 자연과학분야의 6명의 교수들이 함께 모여 400시간이상을 투자해 1차적으로 현재 거의 완료 단계에 있는데 이는 영어 과학기술용어에 대한 우리 말을 다듬는 일이다. 한 용어를 각 분야에서 서로 다르게 사용하고 있어 일어나는 혼란을 최소화 하기 위한 작업이다.

가끔 공부에 게을러질 것 같으면 제자들이 보내준 한 줄의 편지가 자극이 된다. “겨울이면 아직도 어두운 새벽, 학교 주차장 거기에는 선생님의 차가 언제나 홀로 어김없이 주차되어 있습니다. 불 켜진 선생님의 연구실을 보며 다시 한번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다짐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내 스스로 최선을 다해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무언으로 보여 주는 것 밖에. 나를 향한 그들의 눈빛이 말하는 것, 그걸 저버리고 싶지 않아 공부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부경생 교수는

부경생 서울대 농생명공학부 교수는 곤충의 페로몬 분비를 활용, 해충을 예방하는 방안을 정교화시킨 학자로 유명하다. 국제화학생태학회가 그를 기리는 기념 심포지엄을 7월에 미국 워싱턴에서 열었을 정도이다.

페로몬 성분을 곤충방재에 활용하는 기법 자체를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같은 종의 곤충이라도 지역에 따라 페로몬의 화학조성이 다르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연구 뿐 아니라 후학들을 위한 연구 분위기 조성에도 큰 관심을 가져서 아시아 지역의 학자들의 연구와 학술교류를 위한 아태화학생태학회를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달 하순께 이 학회의 회장으로 취임할 예정이다. 아태곤충학회의 회장을 맡아 역시 이달 하순에 국제학회를 제주에서 연다.

1940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후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곤충생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78년 귀국한 후 인삼연초연구소 책임연구원을 거쳐 82년부터 서울대에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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