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시절 불법도청이 당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검찰 수사가 당시 정권 핵심으로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
도청 대상 검찰은 8일 김은성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의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범죄사실을 구속영장에 기재하면서 2000년 12월 권노갑 민주당 최고위원의 퇴진과 관련한 당시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 간의 통화를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국정원이 당시 여당 정치인까지 도청했다는 것은 정치권에 대한 도청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같은 해 11~12월 ‘진승현 게이트’의 주역인 진씨의 회사 인수 및 불법 대출 관련해 주변 인물들의 통화도 도청 대상이 됐다. 서울지검 특수1부가 진씨의 비자금 장부를 압수하고 정ㆍ관계 로비의혹을 밝히기 위해 수사력을 모으던 때였다. 정권안보 목적과 무관하게 자신의 후원자인 진씨를 돕기 위해 국가 조직을 이용해 불법행위를 한 것이다.
김씨는 또 영장실질심사에서 “대형파업 등 사회적 위기가 있을 때에는 도청이 필요했다”고 말해 노동계 등 사회 각계에 대해 필요할 때마다 도청을 했음을 내비쳤다. 검찰은 김씨를 상대로 구체적인 도청 사례들을 확인하고 있다.
DJ정부 도청 검찰은 일단 김씨가 차장으로 근무한 시기에 도청 정도가 가장 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씨는 “전임자들로부터 업무를 이어받았을 뿐”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자신만 희생양이 됐다는 것이다. 김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DJ정부 초기부터 조직적 도청이 이뤄졌다는 얘기가 된다.
이 같은 발언은 김씨가 자신의 혐의를 가볍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휴대폰 도청에 주로 사용된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인 R2가 1998년 5월 이종찬 초대 국정원장 시절에 개발된 점에 비춰 김씨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검찰은 김씨의 후임자인 이수일씨도 도청에 관여한 사실을 확인했으나 이씨가 감청장비 폐기 결단을 내릴 당시 차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1차 조사 후 돌려보냈다.
국정원장 개입 이제 수사의 초점은 당시 국정원장들이 적극적으로 도청을 지시하거나 최소한 알고 있었는지를 밝히는 데 모아지고 있다. 검찰은 이미 당시 국정원장들이 국내담당 차장으로부터 도청 내용을 담은 통신첩보를 정기적으로 보고받았다는 실무자 진술과 정황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 재직 당시 국정원장이었던 임동원, 신건씨는 도청 사실 자체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그러나 “(본인들이 부인해도) 증명할 방법이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따라서 이들의 사법처리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혐의가 입증되면 2000년 10월 이후 행위에 대해서는 통신비밀보호법의 공소시효가 남아 있어 처벌을 면하기 어렵다
김영화 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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