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우가 주운 그림책 1-4/ 안노 미쓰마사 글, 그림. 길지연 옮김. 미래M&B.
‘여우가 주운 그림책’을 보는 순간,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아직 글자를 깨치지 못한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 책에 적힌대로 또박또박 읽어나가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 제가 먼저 책장을 넘기는가 하면 내용을 다 외워 간혹 엄마가 잘못 읽거나 빼먹으면 지적하기도 했다. 내 애의 집중력이 부족한가, 암기력이 남달리 좋은 걸까,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일희일비하던 초보엄마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식 사랑에 눈 먼 고슴도치 엄마였어도 매일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해서 읽는 것에는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변주를 시도했다. 대화를 사투리로 말하기, 그림 속 동물이나 사물을 하나씩 짚으며 아이에게 말 시키기, 글은 무시하고 그림만 보고 이야기 지어내기 등 책읽기라기보다는 책 가지고 놀기 수준이 되었다고나 할까.
아기 여우가 길에서 그림책을 주워와 아빠에게 읽어달라고 조른다. 사람의 글자를 모르는 아빠는 그림만 보고 마음대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모두 네 권으로 되어 있는데 1, 2권은 ‘이솝 이야기’이고 3,4권은 ‘그림동화’로 각각 ‘어부와 아내’, ‘훌륭한 사형제’다. 그래서 책의 윗부분에는 ‘이솝이야기’와 ‘그림동화’의 원래 내용이, 아랫부분에는 아빠 여우가 지어낸 이야기가 있다.
여우가 인간의 그림책을 본다는 것은 이 책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본문에 숫자만 나오면 무조건 수학문제 푸는 것이라고 둘러대고, 심지어 책을 거꾸로 들고 읽기도 한다.
그래서 ‘토끼와 거북’에서는 산꼭대기에 올라간 거북을 골짜기에 떨어졌다고 꾸며댄다. 또 여우의 입장에서 이야기와 그림을 해석하기 때문에 이솝우화에 수없이 등장하는 간교한 여우는 모두 지혜로운 여우가 되고 인간의 욕심과 어리석음이 부각된다.
그림책의 중요한 평가기준으로 그림과 이야기의 일치를 드는데 이 책은 여우가 읽으므로 그 점을 무시한다. 그래서 하나의 그림이 두 가지 이솝우화를 이야기하고, 여러 그림과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기도 한다. 여우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하여 그림의 구석구석을 살피다 보면 하나의 그림으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도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짬짬이 아이에게 내용을 확인해야 할까. 아이들이 그림을 보고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결국 글을 모르는 아이의 눈이 아빠 여우의 눈처럼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책 내용을 나름대로 받아들이자는 이 글을 쓰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지금 중간시험을 치거나, 수능시험 공부하는 우리의 아이들은 매력적인 오답과 정답 사이에서 출제자의 의도를 헤아리느라 머리 싸매고 있을 것이므로.
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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