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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그림자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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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그림자를 마신다

입력
2005.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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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 시인을 일러 ‘응시의 시인’이라고들 한다. 그를 두고 정병근 시인은 “눈에 핏발이 설 때까지,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릴 때까지 지켜”보는 시인이라고 했다.

본 것을 본 대로 묘사할 뿐, 느낌이니 의미니 교훈이니 각오니 하는 2차 가공의 관념을 거부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기성의 가치나 검증된 미적 기준이 개입할 수 없는 완벽한 알리바이이자 그 자체로써 오롯이 하나의 가치, 파생적 가치 이전의 가치를 구현하겠다는, 이르자면 시의 근원 혹은 본질로 곧장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발현일 것이다.

그 지독한 진정성으로 엮은, 그의 여섯번 째 시집 ‘그림자를 마신다’가 나왔다.

‘남부터미널’이라는 짧은 시편의 전문을 보자. “험상궂은 중년 남자/ 잠든 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 어디론가 휴대폰을 걸고 있다// 왼손은/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다/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고 있다/ 아이의 잠을 부추기고 있다” 그 아이가 중년 남자의 늦둥이이건, 철 없는 딸이 내질러놓은 아비 모를 자식이건, 애 엄마가 죽었건 도망쳤건, 약속된 정처가 있건 없건…,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가 그 자리에서 그 토닥거림을 응시했고, 본 것을 본 대로…, 라는 것이다.

그는 응시 대상을 사유화하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 특별한 의미를 씌우지 않는다. 누가 그를 밀치고 그 시적 공간에 개입해도, 그래서 어떤 느낌을 가져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굳이 시인의 전언을 듣고자 한다면, 응시라는 대상 선택 행위 자체에 내재된 시인의 취향이나 묘사의 시어들로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그의 시들은 대체로 그렇다. 시인은 일상 공간에서 만나는 풀이나 꽃, 새소리, 호수의 오리, 억새, 빗방울, 전철 안의 여자 아이, 낙엽, 손자를 업고 나온 할머니, 여행지의 풍경 등을 응시한 뒤, ‘~있다’ ‘한다’투의 서술어미를 달아 줄기차게 옮긴다.

하지만,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무심한 풍경들이 전하는 전언에 전율하게 된다. 겨울 바닷가에 서서 “급소마다 폐타이어를 갖다 댄/ 고깃배들이 옆구리를 맞댄다/ 얼어 터진 볼때기를 비벼댄다”(‘죽변’ 부분)고 할 때, 불이 났던 강원 양양의 계곡에서 “이파리도 가시도 씨방도/ 태워버린 숯 막대기들이/ 본 막대기 밑동에 붙어/ 눈 속을 헤집고 다니고 있다”(‘겨울 법수치 계곡’ 부분)고 할 때, 겨울 밤 산꼭대기 첨탑 위의 점멸등을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을 담은 “붉은 열매는 어디로도 떨어지지 못한다// 눈을 감았다 뜨는 아이/ 눈을 감았다 뜨는 아이”(‘겨울밤’ 부분)라고 할 때, 우리는 뭔가에 찔린 듯, 까닭 없이 사무친다.

“벌통 앞에 말벌이 나타났다// 물려 죽은 꿀벌의 시체/ 벌통 앞에 널려 있다.// 말벌에게 달라붙은 꿀벌/ 말뚝 침을 박아 넣은 꿀벌/ 목을 비틀어 돌린다./ 내장이 풀려 나온다.// 내장이 끝날 때까지 기어가다/ 멈춘 꿀벌의 뒤집힌 다리들/ 배를 감싸 안는다.”(‘끈’ 전문)

제 말에 극도로 인색한 이 시인이 머뭇거리며 한 두 마디 속내를 드러낼 때, 이를 테면,“(존재는 칼날이고)이 세상은 칼집인 것이다”(‘억새풀’)라거나 “후회란 원래 그런 졸속이다“(‘나팔꽃’)라거나 “물린 밥상머리에 앉아 눈물 콧물/ 비벼 짜는 네 모습 어른거린다”(‘그림자를 마신다’)고 할 때, 우리는 속절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도 된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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