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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 노벨위원회 "핵무기를 없애자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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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 노벨위원회 "핵무기를 없애자는 메시지"

입력
2005.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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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마드 엘바라데이(63)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과 IAEA에 노벨평화상이 돌아간 것은 올해가 히로시마(廣島)ㆍ나가사키(長崎) 원폭투하 60주년이란 점, 북한과 이란의 핵 문제가 가장 뜨거운 이슈로 부상한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

전쟁의 위협에서 인류를 해방시키겠다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지를 실현할 평화의 사도로 IAEA가 적임자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노벨 위원회도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자는 메시지”라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노벨 위원회는 인류 피폭 후 10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에 반드시 반핵운동가나 단체에 평화상을 수여했다. ‘히로시마 50주년’인 95년에는 반핵운동가 조세프 로트블랫과 퍼그워시 그룹, 85년에는 핵전쟁을 막기위한 국제 물리학자 그룹, 75년에는 소련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이 상을 받았다.

이번 선정은 IAEA의 과거 공적을 평가하는 의미 외에 미래의 분발을 촉구하는 의미도 담겨있다. 엘바라데이가 유력 후보로 부상하자 일부에서 수상 자격을 문제 삼는 반대론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노벨위원회는 이 같은 어지러운 국제 핵 질서를 감안해 IAEA에 강력한 힘을 실어줄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은 이번 수상으로 핵 중재자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큰 정치적 자산을 얻었다. 경력만으로도 그가 갖는 무게감은 상당하다. 1997년 첫 사무총장에 오른 이래 2001년에 이어 9월 임기 4년의 총장에 선출돼 3기 연속 ‘집권’하는 기록을 세웠다.

엘바라데이 총장은 당초 미국의 도움으로 IAEA 총장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취임 후에는 서서히 소신 행보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3년에는 핵감시기구의 수장으로서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려 한 증거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이라크 침공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미국은 이집트 태생인 그가“객관성을 잃고 있다”는 비난하고 그의 3선 반대공작을 벌였다. 그러나 미국의 지지를 잃은 것보다 훨씬 강력한 지지를 국제사회에서 획득했다. 미국이 내세우려던 총장 후보인 다우너 호주 외무장관은 출마를 거부했고, 미국은 마지못해 막판 그의 3선을 승인하는 초라한 모양새를 자초했다.

1984년 IAEA와 인연을 맺은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은 1942년 카이로 태생으로 64년 외무부에서 직업 외교관으로 공직을 시작했다. 뉴욕과 제네바에서 이집트 대표로 일했고, 뉴욕대학에서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를 밑천으로 IAEA 입성 전 유엔에서 교육ㆍ연구 관련 국제법 전문가로 활동했다.

핵문제에 관한 한 그의 입장은 분명하다. ‘검증(verification) 및 외교(diplomacy)’가 핵 감시자로서의 원칙이라면 ‘이중잣대 불용’은 그의 신념이다. 핵이 어떤 국가에는 대량살상무기로, 또 어떤 국가에는 안보를 위한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불평등한 기준은 용인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또한 부시 미 정부와 껄끄러워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

■ IAEA 어떤 곳

IAEA의 멜리사 플레밍 대변인은 7일 “IAEA에게 노벨 평화상 보다 더 자랑스러운 상은 없다”면서 “우리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 밝혔다. 오스트리아 빈의 IAEA 본부는 감격에 휩싸여 있다.

이 기구의 표어는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ics for Peace)’이다. 유엔 산하 준 독립기구로 1957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연구와 국제적인 공동관리를 위해 설립됐다. 별명은 ‘핵의 감시자 (Nuclear Watchdog)’. 70년 발효한 핵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한 국가들과 안전협정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현지에 감시관을 상주시키며 핵 물질 관리실태를 사찰한다.

그러나 48년 간의 궤적을 돌이켜 보면 표어와 별명이 무색해 진다. IAEA는 조약과 정관에 명시된 강제사찰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핵개발 의심국가로부터 무시당하고, 쫓겨나고 기만 당하기 일쑤였다. 인도 등의 핵보유선언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았고 북한과 후세인 정권 당시 이라크에선 수 차례 축출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공정성 시비에 휘말려 북한으로부터는 미국 등 강대국의 앞잡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하지만 IAEA의 위상은 꾸준하게 신장돼 왔다. 이제는 초강국도 핵을 개발하려는 국가도 그 권위를 무시하지 못한다. 전임 사무총장인 한스 블릭스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노벨 평화상의 수상은 IAEA가 이제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기구로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IAEA는 핵활동 감시 외에 개발도상국의 전력생산을 포함한 원자력의 실용적 응용을 지원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 핵 안전환경보호기준을 설정하고 139개 회원국 간의 업무, 물질, 설비, 시설의 제공 및 과학기술 정보 교환과 전문가들의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주요기관으로는 총회와 이사회, 사무국이 있고 총회는 연 1회 소집된다. 이사회는 지역적안배와 기술전문성에 따라 지명 또는 선출되는 35명으로 구성되며 방사성폐기물관리위원회와 원자력시설안전위원회 등 8개 전문가 위원회가 있다

장학만 기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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