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이 ‘음식을 넣어 다니는 간편한 용기 또는 그 내용물’이라는 뜻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때는 1954년 무렵으로 보인다. 당시 여성들에게 인기 있던 ‘여원’이라는 잡지가 전후 주부들에게 수요가 늘어난 생활정보를 일러주기 위해 ‘여성생활백과사전’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직장인 남편을 위해 점심 싸는 방법을 소개하면서 ‘도시락’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고 한다.
직장인이 매일 도시락을 들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회사와 관공서가 생겨난 일제 때 일이니 지칭하는 말로는 일본어인 ‘벤또’가 주로 쓰였다. ‘벤또’는 해방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벤또’ 대신에 찾아낸 지방 말
그러나 여원의 편집진은 생활정보를 일러주면서 동시에 일본말의 잔재를 없애고 우리말을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도 갖고 있었던 터라 고어나 사투리, 혹은 조어를 통해 새로운 우리말을 많이 만들었다.
여원의 편집자로서 나중에 을유문화사 주간을 지낸 고 고정기씨는 생전에 이 도시락이라는 단어를 만든 이가 소설가 최일남씨라고 했다. 최일남씨는 54~56년에 여원의 편집장을 지냈다.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려고 최일남씨께 전화를 드렸더니 정확히 기억을 하지 못했다.
대신 여성생활백과사전을 만들면서 ‘맞벌이’나 ‘꽃꽂이’ 같은 한국어를 만들어낸 사람은 당신이라고 확인해주셨다. 이전까지 ‘꽃꽂이’는 일본어 ‘이케바나’가, ‘맞벌이’는 영어 ‘더블인컴’이 주로 쓰였다고 했다.
도시락과 비슷하게 쓰일 법한 한국어로는 찬합이나 오그랑망태 같은 용어도 있다고 최일남씨는 가르쳐주셨다. 오그랑망태 또는 주발망태기는 ‘끈을 죄면 끝이 오무라지게 된 갈대망태기로 점심 주발을 넣어 들고 다니던 것으로 제법 점잖다던 이들도 곧잘 들고 다녔다’고 민속생활어사전은 풀이한다.
같은 사전에서 ‘찬합’은 ‘농부들이 허리에 꿰차는 베로 짠 주머니로 주먹밥을 싸가지고 다녔다’고 되어 있다. ‘도시락’은 사전에 ‘고리버들 따위로 엮은 작은 점심그릇, 또는 그 밥’이다. 어느 단어나 들고 다니는 음식자루를 대신할 용어였지만 그 가운데 도시락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물론 여성생활백과사전 덕분이다.
최일남씨가 똑부러지게 기억은 못하지만 도시락이 그 분의 고향인 전주에서 널리 쓰였다고 인정한 것을 보면 고정기씨의 찬찬한 기억력을 믿을만하다. 최일남씨는 그런 점에서 “그 말을 내가 만든 것은 아니고 찾아 쓴 공이나 있으까”라고 점잖은 전주 억양으로 결론을 내렸다.
흐트러진 것을 정돈하거나 중요한 점만 따서 요약한다는 뜻의 ‘간추리다’는 올 6월에 작고한 출판인 김성재씨가 역시 사투리에서 찾아내어 56년 사전에 등재시킨 낱말이다.
지역에 따라 깐추리다, 깐충기다로도 쓰는 이 말은 경북의 사투리였다. 51년 학원사의 전신인 대영출판사의 편집사원으로 입사했던 김성재씨는 이 출판사가 참고서를 내면서 제목을 찾자 대구 피난 때 알게 된 이 말을 제안했다. 참고서가 인기를 끌면서 간추리다는 전국적인 단어가 되었다.
사투리나 지역어는 우리말을 풍성하게 하는 보물창고이다. 그런데 이 같은 풍성함을 오늘날에 되살려 쓰는 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어려운 실정에서도 방언을 정리하는 사전은 간헐적으로 나오지만 수요가 적다 보니 곧바로 절판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게다가 거기 수록된 단어들을 국어큰사전에 수록하는 열성은 사전편찬위원회마다 없는 듯하다. 더욱 괴이한 것은 국어큰사전에서 매우 복잡한 영어단어나 외국인 인명을 풀이해 놓은 항목은 꽤 많다는 점이다. 참으로 무성의한 사전편집자들이다.
●사투리는 우리 말의 보물창고
다가오는 한글날을 기념하여 사전편집자들을 분발케 하기 위해 전국민이 최일남씨나 김성재씨와 같은 열성으로 표준어의 세계를 확장해보면 어떨까. 나부터 하나를 제안한다. 숭태기. 배나 사과처럼 씨방이 가운데에 있는 과일에서 살덩이를 베어먹고 남은 속을 경북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그리고 이와 필적할 표준어를 아직 찾지 못했다. 많이 써주시기 바란다.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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