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그 뒤 열린 재판에서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15가지 죄상을 열거했다.
그 중 첫째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였다. 그러나 심증만 있을 뿐 아직까지 이토 히로부미가 시해 사건에 직접 관련돼 있음을 보여주는 물증은 없는 상태다.
이런 가운데 KBS 1TV가 이토 히로부미의 사건 개입을 암시하는 문건을 발굴 소개하는 내용의 ‘110년만의 추적, 명성황후 시해사건’(오후 11시)을 8일과 9일에 걸쳐 방송한다. 올해 5월 명성황후 시해범 후손들의 방한을 성사시켰던 정수웅 다큐서울 대표가 제작한 ‘110년만의 추적,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전대미문의 국모 시해 사건의 전말과 이에 얽힌 의문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에서 정 대표는 일본 총리대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주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당시 요시카와 사법상(법무장관)이 무쓰 외상에서 보낸 편지를 제시한다.
일본국회도서관 내 헌정사료원에서 발굴된 이 편지에서 요시카와 사법상은 “이노우에 주한공사에게 (이토 히로부미가) 미봉책을 포기하고 ‘결행의 방침’을 채택하도록 강하게 권유하라고 말했다”면서 “이쪽의 희망대로 움직여갈 것 같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고마쓰 구마모토대 교수는 프로그램에 실린 인터뷰를 통해 “서신에서 ‘결행의 방침'은 무력 수단을 통한 해결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아울러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데 사용한 칼과 당시의 기록물, 자객 중 한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만들었다는 명성황후의 석상도 공개하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48명의 무사들 중 21명이 구마모토 출신이었던 까닭을 밝힌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된 배경과 시해 장소를 둘러싼 논란, 사건 이후 반년도 안 돼 모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된 시해범들의 이후 행적, 당시 현장에 있었던 러시아인 사마틴과 미국인 다이가 남긴 기록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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