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 시절 정치적 필요성에서 조작된 공안사건 중 대표적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제2차 인혁당 사건이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을 압살하기 위해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제2차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냈는데 권력의 시녀가 되어버린 사법부가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유죄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그 결과 인권 단체들은 대법원이 인혁당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확정 선고한 날을 사법부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날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
이제 부족하지만 그런대로 민주화가 되었고 그 결과 사법부를 옥죄던 독재 정권의 사법권 침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난 9월 29일은 사법부 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날은 아니더라도 사법부 사상 매우 수치스러운 날들 중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진보정당만 의원직 박탈?
대법원이 17대 총선의 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고 형평성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즉 대법원이 3명의 거대 양대 보수 정당들의 의원들에 대해서는 무죄와 파기환송 판결을 내린 반면 군소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조승수 의원에 대해서는 벌금 150만 원을 선고한 2심 판결을 받아들임으로써 의원직을 박탈한 것이다.
특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유권자에게 금품, 향응을 제공한 혐의로 800만 원의 벌금을 선고받았던 열린 우리당의 강성종 의원, 의료 파업과 관련해 정부의 병원업무 개시 지시에 응하지 않은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던 한나라당의 신상진 의원, 경력을 허위 기재한 혐의로 기소된 열린 우리당의 유시민 의원에 대해서는 파기환송과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조 의원의 경우 주민들의 요청에 의해 모임에 불려가 지역 현안이었던 음식물 자원화 시설 문제에 대해 이 시설이 설치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정책적 입장을 밝힌 것을 가지고 의원직을 박탈한 것이다.
자신의 정책적 소신을 밝힌 것이 돈을 뿌리거나 경력을 속여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보다 중한 죄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번 판결은 진보 정당에 대한 대법원의 적대적 감정과 보수성을 보여준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역시 가재는 게 편이었다.
이 점에서 사법부의 독립과 권한 극대화를 주장했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생각은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즉 국민의 투표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입법부, 행정부와 달리 사법부는 국민의 투표에 의해 뽑히지 않기 때문에 민심이 급진화 할 경우 사법부만이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므로 위헌심사권 등 최종적 권력을 사법부가 갖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탄핵, 행정수도 문제, 국회의원 자격 유지 문제 등은 중대한 사회적 문제들을 국민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으며 낡은 보수 인사들로 채워진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등 사법부가 좌지우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사법부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정당의 선거법 위반자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국민의 의사를 제멋대로 짓밟는 인위적인 정계 개편을 할 수 있다.
●보수적 사법부 전횡 ‘위험’
이용훈 신임 대법원장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국회의 인준을 받은 뒤 유신 시절의 판결 몇 건을 검토해보면서 우리가 국민에 대해 정말 사과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다”며 과거 권위주의 시절 이루어진 잘못된 재판에 대해 자체 조사를 벌인 뒤 구체적인 후속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지금과 같은 판결을 내릴 바에는 과거사에 대해 백 번 사과를 하고 청산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과거사 사과와 청산보다 중요한 것은 언젠가 다시 과거사 사과와 청산의 대상이 될 잘못된 판결들을 지금부터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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