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들, 눈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리랑 공연은 너무 화려해 사방을 봐야 하니까 헷갈릴 수 있습니다.”
지난달 30일 저녁 평양 능라도 5ㆍ1 경기장에서 아리랑 공연이 시작되기 전 북한 안내원이 기자에게 던진 말이다. 장내는 ‘웅웅’ 거리는 소리 속에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남측 관람객들은 능라도를 감싸는 이상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 많은 공연자들이 전혀 틀리지않고 보조를 맞추는 정교함에 대한 경이로움보다는 목젖을 꽉 내리누르는 집단주의의 답답함 같은 것이었다.
관람석 맞은편, 좌석을 개조해 만든 카드섹션용 배경대에 앉은 2만명의 평양 시내 중학생들은 마지막 연습에 한창이었다. 만경대, 대동강, 낙랑 등 평양 시내 10개 구역에서 온 학생들은 하얀 옷을 맞춰 입고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연습했다. 이들은 13~16세의 중학생이라고 했다.
북측 안내원은 “3개월 정도 반나절 수업이 끝나면 나머지 시간에 연습했다”고 말했다. 30대 초반의 안내원에게 “이런 행사에 참여해 본 적 있느냐”고 묻자 “중학교와 군 복무 시절 2차례 경험이 있는데, 단결심을 기를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북한은 1970년대 초반부터 아리랑과 유사한 집단공연을 시내 김일성경기장에서 매년 한 차례 꼴로 개최하다 89년 능라도경기장이 건설되면서 공연장소를 옮겼다.
2002년 집단공연 명칭을 아리랑 축전으로 바꾸었고, 올해는 광복 60주년과 북한 노동당 창건 60주년(10월10일)을 기념하기 위해 8월16일부터 10월17일까지 공연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연에는 5세 어린이부터 대학생까지 총 6만명의 인원이 참여한다.
오후 8시 조명이 꺼지고 경기장 하늘 위로 축포가 터지면서 공연이 시작됐다. 카드섹션은 평양 시내 개선문 그림과 ‘조국해방’이라는 글자에 이어 “조국해방의 은인이신 어버이 수령님께 최대의 경의를 드립니다”라는 구호를 표현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운동장에는 색색 한복을 입은 여성 수천명이 꽃춤을 추고 있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이 공연을 바친다는 의미 같았다.
1시간20분의 공연 내용 역시 이 같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1장은 일제 시대를 거쳐 북한의 건국까지를 다루었다. “김 주석이 무장투쟁을 통해 일제와 미제를 몰아냈다”는 주장이 각종 군무와 카드섹션에 담겨 있었다. 2장은 북한이 선군(先軍)정신으로 근대화를 이뤄내는 과정으로, 5~9세 남녀 어린이 수천명의 집단 체조가 눈길을 끌었다.
특히 2장 마지막 부분 ‘인민의 군대’ 편에서는 북한 군인 수천여명이 그라운드에 등장, ‘총, 폭, 탄’ 구호에 맞춰 총격술(남측의 총검술)을 펼쳤고, 낙하산을 탄 군인이 경기장 꼭대기에서 뛰어내린 뒤 국방색 군복 차림의 상대와 대련하는 장면도 연출했다.
3장과 4장은 눈을 아찔하게 하는 공중교예 장면과 통일을 기원하는 군무로 채워졌다. 취주악대의 ‘우리는 하나’ 음악에 맞춰 펼쳐진 “수령님의 유훈은 조국통일”이라는 카드섹션은 클라이막스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장백산 줄기 따라’로 시작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로 마무리됐다.
공연이 끝나자 북측 안내원은 기자에게 감상을 물었다. 기자는 “상황을 압도하는 숨막힌 공연이었는데 어린 꼬마들이 동작 하나 틀리지 않을 정도로 연습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했다”고 답했다.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수십년 변화 없이 살아가는 당신들의 삶이 공허하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는 꺼내다 말았다.
평양=정상원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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