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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33) 아름다운 기형의 세게- 다이안 아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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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33) 아름다운 기형의 세게- 다이안 아버스

입력
2005.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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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생인 시인 김수영은 ‘무수한 반동’들이 좋다고 말했지만, 비슷한 또래의 미국 사진작가 다이안 아버스(1923~1971)는 ‘나는 무수한 기형들이 좋다’고 말했을 성싶다.

반동과 기형은 생래적으로 다른 단어처럼 여겨지지만, 동양의 한 다혈질 시인과 독특한 취향을 지닌 유태계 미국 여성 사진작가를 동시에 떠올려 보면 두 단어 사이에 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김수영이 ‘거대한 뿌리’에서 언급한 반동들이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들이라면, ‘하퍼스 바자’ 등의 잡지에서 패션 사진을 찍던 다이안 아버스가 스승 리제트 모델을 만난 이후 성향을 바꿔 줄창 찍어댄 인간 군상들은 샴쌍둥이, 나체주의자, 동성애자, 복장도착자, 난장이, 거인, 정신지체자 등이다. 반동이든 기형이든 어쨌거나 그(것)들은 변두리에서도 더 벗어난 음지에서 상궤를 이탈한 삶을 산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동이 정치적인 용어라면, 기형은 생물학적인 용어다. 두 단어를 섞으면 ‘생물학적 결핍을 지닌 부류들의 정치적 반동성’이란 말이 탄생할 수도 있다. 그렇게 정리해 보니 반동과 기형이 태생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아울러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이 어떤 맥락에서 소위 히피 시대 젊은이들의 정치적 급진성과 맞물려 세계의 불가사의한 이면을 들춰낸 전설적인 ‘음화’로 남게 되었는지가 명확해지기도 한다.

요컨대 기형은 통상적 의미에서의 ‘불구’보다는 (문화적 의미에서의)’전위’나 (정치적 의미에서의)’혁신’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다이안 아버스에게 기형은 태생적인 결핍 탓에 세계의 다른 지평에 도달한 초월적 존재와도 같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수수께끼에 답을 요구하는 동화 속의 인물처럼 기형인들에 대한 특징적인 전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을 당한 뒤 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된다. 기형인들은 이미 이러한 인생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삶을 초월한 고귀한 사람들인 것이다.’- 다이안 아버스

그녀의 말마따나 기형들은 출생에서부터 선험적인 고통을 끌어안고 태어난 인간들이다. 전쟁이나 사고 등에 의해서 후천적으로 기형이 된 사람들이 육체적 고통 이상의 심리적 내상과 자기파멸성, 그로 인한 고통의 현시욕이 강화되는 반면, 선천적 기형들은 타고난 고통으로 인해 오히려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들에겐 고통이나 절망이나 슬픔 등의 단어로 요약되거나 통합되지 않는 특별한 정서가 있다. 나란히 선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일란성 쌍둥이 자매의 표정에서처럼 그들은 똑 같은 얼굴에 수만 가지의 표정을 동시에 그려낼 줄 안다.

그러면서 그 흔한 고통과 기쁨이 그들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한 표정을 최종적으로 짓는다. 아무런 기법 실험 없이 무덤덤하게 찍어낸 듯한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들이 사뭇 낯설고 강렬하게 다가오는 건 그 때문이다.

‘수수께끼에 답을 요구하는 동화 속의 인물’이라 표현하기도 했거니와, 다이안 아버스의 인물들은 흡사 이상한 나라 저편에서 홀연히 이쪽 세상을 방문해 짓궂은 농담이라도 던질 듯한 느낌을 준다.

또는, ‘이쪽 세상은 참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요란스럽기도 하군’하면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릴 것만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정확하진 않겠지만, 짐짓 이물감을 주는 형상을 한 그들에 의해서 카메라 이편의 세상이 감추고 있는 불온한 기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불온성이 세상의 이편에 끈질기게 들러붙은 채로 저편의 세상에 대한 기별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김수영이 말한 ‘시적 불온성’과 동궤에 놓여 있는 것도 확실하다.

기형은 불구가 아니라 불온의 온상이다. 기형은 이지러지고 망가진 채로 현존하는 것들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긍정이자 극복이다. 그런데 그 긍정과 극복은 통상적 관념과 형상들로부터 이탈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에서 한시적인 초월의 양상을 띤다.

다른 형상을 갖는다는 건 그 자체로 이미 세상이 부여하는 존재의 정언명령을 자의든 타의든, 위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건 존재의 다른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기형은 선험적인 재앙에 속하지만, 소위 정상이라 불리는 것들의 편에서 성립된 관념들을 무색케 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기형은 ‘뭔가 다른 것’이다.

육체적 의미든 관념적 의미든 ‘뭔가 다른 것’은 통상의 질서와 인식 체계와 미감(美感)마저 전복시키는 능력을 지녔다. 그건 삶과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의미를 생성케 한다.

다이안 아버스는 단지 소외된 자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자는 박애주의자의 심정으로 그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다. 그녀의 사진에서 처음 느껴지는 건 연민이나 고발성보다는 친밀감과 동조의식이다.

그녀는 사뭇 적대적이거나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기형들과 인간적인 유대감을 가진 이후에야 그들을 찍을 수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사진을 보면서 세상이 돌보지 않는 자들의 소외감을 대신하겠다는 사명감만 느끼게 된다면 되레 카메라 저편의 기형들에 대한 모독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이 만약 한없는 연민을 가지고 그들에게 젖은 손을 내민다면 그들은 아마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며 오히려 당신을 이상한 벌레보듯 할지도 모른다.

기형들은 소심한 듯하지만, 의외로 고집이 세고 자기 세계가 강하다. ‘답을 요구하는 듯한 동화 속의 인물’들에게 정상인들이 해줄 수 있는 답은 그저 무연히 그들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그러다 보면 정상인 듯 보이는 이 세상이 엉터리 허구에 불과하다는 서늘한 깨달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기형은 세계의 잉여가 아니라, 세계가 결핍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명백한 증언자들이다. 그들이 반동일 수밖에 없는 건 그 때문이다.

기형은 비록 선험적이긴 하나, 그걸 천형이나 원죄 등의 개념으로 묶어버리는 건 그들을 세상의 논리체계 안에서 지워버리려는 소위 ‘정상인’들의 기만책동에 불과하다.

‘이 세계 자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존재한다’는 장 보드리야르의 말을 거꾸로 변용하자면, 세계는 ‘이 세계 자체가 기형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들의 기형성을 내세운다’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요컨대 부족이나 결핍 등의 단어로 기형의 의미와 역할을 한정함으로써 모든 반동적 일탈을 제어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구히 기형들을 세상의 변두리에 팽개쳐둔다.

사실, 기형들의 디즈니랜드는 정상인 척 하는 세계가 스스로의 결핍과 불안정성을 덤터기 씌우기 위해 가설한 정상인(이라고 스스로 착각하는 그 모든 인간)들의 오지에 가깝다.

따라서 정작 불행한 건 별 생각 없이 눈알만 굴리고 있는 기형들이 아니라 그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며 스스로의 정상성에 가슴을 쓸어 내리는 그 모든 정상적인 겁쟁이들이다.

하지만 정상과 기형에 대한 이분법이 주요요지는 아닐 뿐더러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육체적 기형은 극복 불가능한 성질의 것이지만, 다이안 아버스의 통찰처럼 기형들은 선천적으로 극복 불가능한 몸을 가지고 정상인들이 극복하지 못하는 것들을 극복해낸다.

그들에겐 그런 극복마저 선험적이다. 관건은 육체가 정상이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현재의 삶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스스로의 장애와 한계에 대한 명징한 이해와 긍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건 정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육체의 문제이고, 삶의 문제인 동시에 죽음의 문제이자, 나 자신의 문제를 넘어 세계 전반에 대한 전면적인 통찰을 얻는 힘이기도 하다.

시인 랭보는 ‘결함 없는 넋이 어디 있으랴’라고 노래했지만, 삶에서 진정한 자기만의 힘을 얻는 건 스스로의 내핍함과 마음의 불구를 몸의 전환을 통해 이겨내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의 새로운 개벽을 위해선 육체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김수영이 ‘시는 온몸으로 쓰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 ‘온몸’은 다른 무엇에 대한 비유도 상징도 아닌, 바로 ‘온몸’ 그 자체이다.

‘온몸으로 한꺼번에 나아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온몸’의 변화를 촉발한다. 따라서 육체가 변화하지 않으면 정신도 변하지 않으며, 한 개인의 삶의 태도가 혁신되지 않으면 세계 또한 변하지 않는다.

그 변화 과정 자체에 대한 치열하고도 냉엄한 탐색이 삶의 주요한 결정들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 결정들은 평면적으로 고착된 정상인들의 세계에선 기이하고 낯설고 요령부득한 이물처럼만 보인다. ‘곰보’ 같이 흉측하고 ‘애꾸’ 같이 기분 나쁘며 ‘요강’처럼 냄새마저 풍긴다.

‘애 못 낳는 여자’처럼 쓸모 없어 보이고 ‘무식쟁이’만큼 답답해서 도통 이 세계의 전면에 드러나선 안될 요물 같기만 하다. 그런데 정작 사람을 변하게 하는 건 자신 속에 숨은 그 요물들을 긍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기형은 이 안일한 세계의 반동력을 추진하는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들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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