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문학상의 색깔이 이처럼 선명하게 부각된 예가 없을 듯 합니다. 가히 젊은 문학의 반란이라 할 만합니다.”
2일 열린 제38회 한국일보문학상 본심에 9편의 작품이 올랐다. 돋보이는 사실은, 아직 일반 독자들에게는 낯설지만 문단 내부에서는 무서운 신예로 주목 받아 온 작가들이 선전했다는 점이다. 심사위원(문학평론가 김동식, 김형중, 방민호)들은 자신들이 뽑은 작가와 작품 리스트를 놓고 뿌듯해 했다. “문학 내부의 변화에 대한 열망, 그 성취 가능성과 역량을 가늠하게 하는 증거들일 것입니다.”
심사경위 및 결과
심사는 2004년 10월부터 올 9월까지 국내 주요 문예지와 단행본 등을 통해 발표된 소설 작품을 두고 이뤄졌다. 예심은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 심사위원들은 수 백편의 대상 작품들을 따로 훑어본 뒤 집중 독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10편씩을 추천했다. 이들 추천작 20편(중복 추천 제외) 하나하나를 놓고 심사위원들은 3시간 가량의 토론 끝에 9편을 뽑았다.
강영숙의 ‘갈색 눈물 방울’ 공선옥의 ‘유랑가족’(장편)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 김연수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김중혁의 ‘무용지물 박물관’ 박성원의 ‘인타라망-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5’ 전성태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 정지아의 ‘풍경’ 편혜영의 ‘시체들’(가나다순)이다.
후보작 촌평
강영숙씨의 ‘갈색 눈물 방울’은 한국 사회의 절대 타자인 외국인 이주민의 문제를 동정이나 연민 혹은 신비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설득력 있게 그린 점이 높이 평가됐다. 또 구태의연한 상징을 동원하는 대신, 이미지들을 무심히 풀어놓음으로써 도식을 거부하는 듯한 글쓰기가 강한 인상을 남겼다.
너무 많이 말해서 이제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는 가난의 문제를, 독하게 그 극단까지 파고 든 공선옥의 ‘유랑가족’이 장편으로는 유일하게 본심에 올랐다. 가난이 우리를 여전히 괴롭히는 한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는 일종의 항의와, 그 처참한 절대가난의 리얼리즘에 설득당했다고 심사위원들은 말했다.
2003년 등단해 아직 작품집을 낸 적이 없는 김애란(25)은 근래 발표한 작품들이 고르게 좋았던 것으로 평가됐다. ‘달려라 아비’는 상처의 기원일 수 있는 ‘아버지’를 긍정하며 원한과 상처를 만들지 않으려는 발상과 태도가 이전 세대의 작가들과 대비되고, 그래서 더욱 경쾌하고 따뜻하게 읽힌다고들 했다.
역사 등 기록된 것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허구를 통해 사실의 한계에 저항해 온 작가 김연수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 본심에 올랐다. 등산 책 문자 등의 문제를 중첩 시키며 불가지론(不可知論)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주제로 육박해 드는 기교와 힘이 탐스럽게 익었다는 평을 들었다.
‘중고 신인’ 김중혁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새로운 대응방식과 힘을 보여준 작품 ‘무용지물 박물관’이 뽑혔다. 시각 이미지가 지배하는 감각의 제국에 라디오와 시각장애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음성언어의 의미를, 도식의 함정을 절묘하게 비껴가며 자못 감동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이 호감을 샀다.
박성원의 ‘인타라망-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5’는 최근 한국소설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사건’을 치밀하게 복원, 읽는 재미를 선사하는 데다 그물처럼 얽혀 있는 존재의 비극성과 공허함 등을 응축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라는 평이었다.
전대협 세대인 전성태씨는 탈북자 이야기인 ‘강을 건너는 사람들’로 본심에 올랐다. 소재의 현장성이 단연 돋보였다는 평이었다. 숨진 아이를 업고 강을 건너는 장면 등을 처절하고 긴박하게 풀어나간 솜씨와 서사를 통해 북한의 체제 위기 등의 현실 문제를 함축적으로 담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정지아는 ‘풍경’ ‘운명’ ‘소멸’ 등 최근 작품들의 경향이 작가가 견지해 온 ‘빨치산 아버지’의 자장을 벗어나 삶의 문제에 깊이 다가서고 있다는 점이 호감을 샀다. 이 가운데, 정물처럼 느린 모자(母子)의 삶의 풍경과 세상의 부산함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뼈아프게 묻는 ‘풍경’이 본심에 올랐다.
최근 첫 작품집을 낸 편혜영은 낯선 감각을 통해 세계와 맞서는 드문 승부사라는 평이었다. 자연과 문명의 이분법적 구도를 조롱하며 구원으로서의 자연마저 회의하는 작품 ‘서쪽숲’과 그로테스크한 세계성을 극단적인 상징을 통해 제시한 ‘시체들’이 맞섰고, 치열함이 돋보인 ‘시체들’로 어렵사리 합의됐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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