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생일 개천절은 단군왕검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한 서기전 2333년 음력 10월3일을 기리기 위해 1949년 제정되었다.
그러나 ‘개천(開天)’이라는 본뜻을 엄밀히 따질 때 단군조선의 건국일을 뜻한다기보다는 이보다 124년 앞서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천신인 환인의 뜻을 받아 처음으로 하늘문을 열고 백두산 신단주 아래 내려와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의 대업을 시작한 기원전 2457년 10월3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날을 기리는 거족적인 제천의식은 고조선 이후부터 시작됐는데,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신라와 고려의 팔관회 등에서 행해진 제천행사가 그 예다.
이 날이 개천절이라는 이름으로 경축일이 된 것은 1909년 나철이 대종교를 창시하면서부터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음력 10월3일을 개천절로 공식 채택해 중국으로 망명한 대종교와 합동으로 경축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음력 10월 3일을 해마다 양력으로 환산하기 어렵고 ‘10월3일’이라는 기록이 소중하다는 지적에 따라 1949년부터 양력 10월3일로 바뀌었다.
10월3일이라는 개천절의 날짜는 우리민족이 10월을 상달(上月)이라 부르며 한 해 농사를 추수한 후 햇곡식으로 제상을 차려 제천행사를 행해 왔고, 오래 전부터 숫자 3을 길수(吉數)로 귀하게 여겨왔다는 데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재야사서 ‘단군세기’에 “개천 1565년 상월 3일에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은 신화일 뿐이라는 주류 학계의 입장으로 인해 개천절의 의미는 상당히 퇴색돼 왔다. 일부 종교학자와 종교인들이 단군을 신흥종교나 미신으로 취급, 전국의 수많은 단군상이 우상숭배를 철폐한다는 명목 하에 목을 절단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이념은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된 현대의 사회병리를 치유할 대안으로 그 현대적 의의를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신과 동물과 인간이 결합해 환웅-환인-단군 3대로 이어지는 단군신화의 내용은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가, 문명과 환경이 대치하고 있는 이 시대 조화와 화합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통일 이후의 민족적 구심점의 역할을 기대하게 한다.
고려대 사학과 최광식 교수는 “북한도 단군을 민족시조로 섬기며 단군신화에 대한 연구 개발에 노력하고 있다”며 “민족시조에 대한 공통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조성된 민족의 일체감이 통일을 위한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것은 물론 문화적 동질성을 이뤄나가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 국내 단군 유적들
국내에는 예로부터 단군을 기려온 여러 사적들이 남아 있으며 단군을 모시고 있는 사당들도 여럿이다.
참성단
해발 467fm의 마니산(인천 강화군) 정상에 위치한 돌로 쌓은 3fm 높이의 제단이다. 사적 136호. 참성단(塹城壇)이란 명칭은 성(城)을 파서(塹) 제단(壇)을 쌓았다는 데서 유래했다.
재야사서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단기51년(BC2283년)에 단군이 참성단 축성을 명하고 3년 뒤에 직접 이곳에서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제단의 아래가 둥글고 위가 네모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형상은 하늘과 땅, 인간이 하나되는 우리 선조들의 우주관을 반영한다.
참성단은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단군유적으로 최근 북한은 평양 부근 화성동에서 참성단과 유사한 외관의 제단을 발굴해 단군유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천제단
제단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해발 1,561fm 태백산(강원 태백시) 정상에 있다. 천제단(天祭壇)은 신라시대부터 임금이 직접 제사를 드리던 곳으로 ‘환단고기’에는 단군이 즉위 원년에 사자를 보내 이곳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중요민속자료 228호.
또한 조선시대의 학자 성현의 ‘허백당집’에는 이곳을 방문하는 삼도(강원ㆍ경상ㆍ충청도)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서로 어깨가 부딪치고 앞사람의 발뒤꿈치를 밟을 정도라고 기술되어 있다.
천제단은 한말 의병장 신돌석이 백마를 잡아 기도하자 하늘에서 뇌성이 울렸다고 전하며 일제시대에는 독립군이 기원제를 지내는 등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제를 올린 성스러운 곳으로 전해져 온다.
기타
단군의 세 아들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가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三郞城)이라고 부르는 정족산성이 마니산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160여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적 130호.
서울 사직공원 안에 위치한 백악전(白堊殿)은 국내 최초의 단군성전으로 1973년 서울시교육청에서 청소년 역사체험장으로 지정했다.
이곳에서는 10월3일 개천절과 단군이 돌아가신 3월15일 어천절에 제를 올린다. 이처럼 단군을 모신 사당은 전국적으로 100여개가 있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k.co.kr
■ 北 "단군릉 실재" 南 "글쎄"
단군릉은 과연 역사적 실재인가, 정치적으로 조작된 허구인가?
북한이 1993년 10월 ‘단군릉발굴보고’를 발표하고 단군이 5,011년 전의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한 이후 단군릉을 둘러싼 남북의 입장차는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93년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서 발굴된 단군릉에서는 두 사람 분의 유골 86개와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장식, 돌림띠 조각 등이 출토됐다.
북한은 유골을 감정한 결과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의 것이며 이는 단군 부부가 함께 묻힌 것으로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또 이 유골을 연대 측정한 결과 약 5,011년 전의 것으로 입증됐다고 밝혔다. 사실이라면 삼국유사에서 이야기하는 연대와 비슷한 것이 된다.
북한은 이후 94년에 새 능을 대대적으로 신축하면서 신화 속 인물로 간주되던 단군이 실존인물이라는 사실과 단군이 우리 민족의 원시조이자 고조선의 건국시조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한 학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우선 북한에서 연대를 측정한 방법인 전자상자성공명법은 만년 단위 이상의 연대를 측정하는데 의미를 가지나, 수 천년 단위를 측정할 때는 정확하지 않다는 것.
또한 그 무덤이 단군의 묘라는 기록은 16세기 초반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서 처음 볼 수 있는데, 4,500년 전의 일을 기록한 사료를 가지고 반드시 단군의 묘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무덤양식과 유물로 볼 때 고구려 귀족의 무덤이라는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북한은 단군의 무덤을 고구려 때 새로 개장한 것이라고 해명하지만 이를 증명해줄 사료는 없다.
노태돈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사실 관계를 따졌을 때 단군릉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 남한 학계의 정설”이라며 “94년 신축한 뒤로 남북한의 입장 차이는 그대로”라고 말했다.
노 교수는 “그러나 민족적 상징으로서 단군이 가지는 의미는 남북한이 모두 인정하고 존중하고 있다”며 “다만 그것을 5,000년 전 만들어진 실재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 올해 경축 행사
제4337주년 개천절 경축식이 3일 오전 10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3부 요인을 비롯한 정부 및 각계 인사, 주한외교사절, 시민대표 등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다.
행정자치부는 경축식에 국내에 유학중인 재외동포, 인터넷 국민참여 신청자와 이북5도민 대표 등을 초청, 통합과 번영 및 선진한국 창조를 알리겠다고 밝혔다.
경축식 후에는 국립국악단의 서도소리 공연과 인간문화재 이생강 명인의 대금과 색소폰 협연, 국립국악단의 굿과 사물놀이 등 국악과 서양음악이 어우러진 30분간의 경축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한편 이날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는 사단법인 현정회 주관으로 단군 제례의식이 거행되고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는 칠선녀 성무 및 성화 채화 행사가 열리는 등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경축행사가 열린다.
행자부는 “개천절 당일에는 고궁과 능을 무료로 개방하고 전국 주요 도로변에 태극기가 게양될 예정” 이라며 “일반 가정과 직장에서 태극기 걸기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당부했다.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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