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새 대법원장이 취임과 함께 과거사 문제 처리에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법원과 검찰에도 과거사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과거사를 해결하려는 정치권과 자체 위원회를 통해 이미 진상규명 작업을 진행중인 국정원, 군, 경찰 등과는 달리 법원과 검찰은 그동안 이 문제에 관해 신중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 각각 “이미 판결로 확정된 사안을 흔들 경우 법적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법원), “검찰의 과거사는 법원 판결과 연관돼 있어 독자적으로 추진하기 어렵다”(검찰) 등이 주된 논리였다.
현재 법원은 상당히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대법원장의 취임 당일 언급이 있자마자 다음날인 9월 27일 법원행정처는 전국 법원에 1972~89년 사이 시국ㆍ공안사건 판결문을 수집해 달라는 협조공문을 보냈다. 일단 판결문을 파악한 뒤 적절한 조치를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실태파악’이 곧바로 ‘어떤 조치’와 연결되는 데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이 대법원장은 취임 당일 “과거사 처리에는 재심, 인적청산, 별도의 조사위원회 등을 통한 해결방안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한 뒤 이 가운데 인적청산과 위원회는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유일하게 가능한 재심도 현행법에 가능 사유가 명시돼 있고 이 역시 개개 법관들이 재판을 통해 판단할 문제여서 대법원장이라 해도 ‘어떻게 하라’고 말할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법원 내부에는 “신임 대법원장의 뜻대로 과거사를 해결하려면 재심 청구 요인 확대는 필요할 것”(서울중앙지법 한 부장판사)이라는 긍정론도 나온다. 하지만 “어느 사건은 되고 어느 사건은 안되냐는 논란이 예상되니 조건과 범위를 세심하게 조절해야 한다”(또 다른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법원이 ‘여러 문제를 감안해 신중히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히면 정치권에서 각종 특별법으로 해결하려는 발상은 위험하다는 것은 법원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는 최근 들어 각종 입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마자 위헌 심판대에 오르는 경향과도 무관치 않다는 게 법원 내부의 지적이다.
법원에 비하면 검찰은 여전히 신중한 입장이다. 검찰은 각각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해 자체 조사를 진행중인 군, 국정원, 경찰 등과 함께 행정기관의 일원이면서도 법원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소추기관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동안 매우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검찰 관계자는 “곧 출범할 범정부적 성격의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선정하는 사건 조사에 적극 협조할 방침”이라며 “과거사와 관련한 검찰 별도의 자체 조사 추진계획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원 판결과 무관하게 검찰이 자체적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던 사건들에 대해서도 지금껏 검찰은 별다른 방침을 밝힌 바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판결 연관성을 내세워 지나치게 책임을 회피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일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지난달 30일 열린 정책위원회에서 과거사 청산 필요성 의견이 일부 제시됐으나 고려할 요소가 많아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만 합의했다”고 말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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