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 영국, 소련 등 3국 수뇌부의 손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의 손자 커티스 루스벨트(75),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이름이 똑같은 손자(64),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그루지야 성(姓)을 그대로 쓰고 있는 예브게니 주가쉬빌리(69)씨.
이들은 1일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의 거버넌스 대학원에서 열린 유럽 통합 관련 토론회에서 만나 전쟁과 얄타회담의 성격 등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2차 대전 종전을 앞둔 1945년 2월 4일 독일 점령과 유럽 재편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할아버지들이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동한 지 60년 만이다.
이제 백발이 된 손자들은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토론을 이끌었지만 중요 쟁점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맞섰다. 먼저 주가쉬빌리씨가 “세 분이 개인적으로는 친했지만 사실 할아버지는 미국과 영국을 화해할 수 없는 적으로 간주했다. 실제 처칠 총리는 전쟁이 끝나자 소련과 전쟁을 시작하려고 마음 먹었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에 처칠씨는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소련의 ‘붉은 군대’의 점령 위협에 직면해 있는 유럽의 운명을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응수했다.
이들은 얄타회담의 성격과 관련해 첨예한 입장 차를 드러냈다. 루스벨트씨는 미국의 뒤늦은 참전 때문에 회담에서는 당시 상황을 추인하는 거의 실무적인 사항들만 논의됐다고 주장했다.
“소련을 제외하고는 미국과 영국이 회담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진주만 사태’가 일어날 때까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다.” 처칠씨도 “스탈린은 회담이 있기 전 이미 유럽의 절반을 손에 넣었다”며 러시아가 얄타협정의 최대 수혜자라는 주장에 의견을 같이했다.
일부 학자들은 동구권에 대한 소련의 지배력을 인정한 회담 결과가 수십 년에 걸친 동ㆍ서 냉전의 불씨가 됐다고 비난한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지난 5월 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일을 맞아 방문한 라트비아에서 얄타회담을 “역사상 최대의 실수 가운데 하나”라고 혹평한 바 있다.
하지만 주기쉬빌리씨는 “회담 결과는 공정했다”며 “독일군에 의해 얼마나 많은 소련인이 희생됐는지를 떠올리면 합의 사항이 전적으로 군사적인 측면만 고려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손자들은 여러 면에서 할아버지들과 닮았다. 처칠씨는 할아버지처럼 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세계 여러 분쟁지역에 관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유엔 관리를 지냈고 저술,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루스벨트씨는 큰 키와 안경을 낀 외양뿐 아니라 신중하게 답변하는 자세가 할아버지와 꼭 닮았다는 평이다.
소련군 대령 출신으로 군사학자인 주기쉬빌리씨는 작은 키와 재치있는 화술로 유명했던 스탈린과 비슷하다. “서구에서 스탈린은 ‘살육자’로 악명이 높지요.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그는 조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분이었으니까요.”
김이삭 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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