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아파트 뒷마당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는 일이 즐겁다. 아파트 단지 뒤의 작은 동산 가장자리에 아름드리 굴참나무 세 그루가 있고, 나뭇가지의 절반 정도가 단지 안으로 넘어와 있다. 워낙 키가 커서 주차장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도토리는 단단한 껍질이 쪼개진다.
그래도 운 좋게 좁은 화단의 흙에 떨어진 말끔한 도토리를 주울 수 있다. 같은 나무에 매달렸던 놈들이지만 크기와 모양, 색깔이 다 다르다. 하얀 천 위에 늘어 놓고 들여다 보면 저마다 뽐내는 듯한 모습에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돈다.
■‘도토리’라고 하면 도시 아이들은 참나무 열매보다 온라인게임의 대용화폐를 먼저 떠올릴지도 모른다. 자연의 도토리도 쓰임새가 가상공간의 그것 못지않다. 시골에서 아이들은 둥근 도토리를 가려서 구슬 대신 가지고 놀았고, 어머니들은 물에 담가 떫은 맛을 뺀 후 말려 가루를 내어 묵을 만들었다.
서울에서는 도토리묵이 반찬 취급을 받지만 산간 마을에서는 메밀묵과 다를 바 없이 가늘게 썰어 뜨거운 물로 슬쩍 씻어 낸 후 고명을 얹어 국수처럼 말아 먹었다. 쌉쌀한 뒷맛이 일품이고, 충분히 한 끼를 때울 만했다.
■도토리가 달리는 참나무는 참 종류가 많다. 굴참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등과 그 각각의 잡종 등 다양하지만 크게 나누어 잎이 밤나무처럼 좁고 긴 것과 상수리나무처럼 넓은 것이 있고, 묘하게도 열매 모양도 잎을 그대로 닮아 가늘고 길거나 짧고 동그스름하다.
인간이 도토리를 식용으로 삼은 것은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활엽수림의 견과류는 수렵ㆍ채집 경제의 중요한 요소였고, 그 가운데 도토리가 중심이었다. ‘꿀밤’이라는 엉뚱한 별명도 그런 원시의 추억과 닿아있는지 모른다.
■도토리묵이 저칼로리 식품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볼썽사나운 모습도 적지 않았다. 숲을 뒤지며 도토리를 줍는 모습이야 괜찮지만, 커다란 돌멩이로 내려 찍힌 참나무 등걸을 보는 마음은 늘 편치 않았다.
다람쥐와 청설모가 주인공이 되어 “우리들의 겨울 양식을 빼앗아 가지 마세요”라고 호소하는 팻말이 숲에 서더니, 아예 도토리 채집을 금지하는 지자체가 늘고 있다. 다람쥐를 위한 ‘아름다운 발상’이지만 지천으로 널려 썩어가는 도토리의 현실과 는 동떨어져 있다. 청설모 개체수 급증을 생각하면 먹거리 조절이 꼭 인간에게만 필요한 게 아닐 것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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