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보면 자연의 일에도 사람의 일에도 어떤 순서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소년 소녀가 되고, 그 소년과 소녀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처럼 한 계절이 오고 가는 데에도 어떤 순서가 있는 것 같다.
봄에 산과 들에 꽃이 피는 순서가 있듯 가을엔 곡식이 익는 순서와 과실나무의 열매가 익는 순서가 있고, 또 많은 나무들이 빨간색이든 노란색이든 단풍이 드는 순서가 있는 것 같다.
사람이 일부러 심어 가꾸는 곡식보다 뽑아도 뽑아도 기어이 그 자리에 다시 올라오고야 마는 풀씨들이 늘 먼저 자기 씨앗을 익힌다. 벼보다는 피가 빨리 여물고, 조나 수수보다 밭의 호랑이라는 바랭이가 먼저 제 씨앗을 퍼트린다. 곡식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이모작이 안되지만 풀은 흔하게 스스로 이모작 삼모작을 한다.
산과 들의 나뭇잎도 물드는 순서가 있다. 말은 가을이어도 아직 온 동네 나무가 다 푸른데, 화살나무만 먼저 분첩을 꺼내든 것처럼 붉은 기운을 더하고 있다. 나무의 생김새만 화살 같은 것이 아니라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데도 화살처럼 선봉에 선다. 이제 모든 나무들이 불 붙인 화살처럼 저 나무의 뒤를 따를 것이다.
소설가 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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