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여자가 그리도 세냐? 에우리피데스의 ‘바카이’에 나오는 마이나스들처럼 온통 머리를 풀어헤치고. 너의 펄럭이는 옷소매에 종일 유리창 깨지는 소리. 펜테우스 같은 오만한 인간들에게 무시당한 기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뱀을 감은 팔로 부르튼 젖을 늑대에게 물리면서 단숨에 거친 파도의 수많은 산을 뛰어넘다니.
미국 뉴올리언스를 순식간에 눈물바다로 만들고 사람 대신 악어가 살게 하다니. 원래 늪이었으니 다시 늪으로 돌아가라는 것인가? 사람이 밟을 흙은 어디에 있으며 잠시를 지탱할 방주는 또 어디에서 구한단 말인가? 지난 수백 년 동안 바다에서 숨진 자들의 목소리를 실어 날라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바다 속 진주가 된 눈들이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 눈들이 이상한 부두로 변해버린 구시가지 프렌치 쿼터를 보면, 파도 소리에 잠긴 재즈 음악과 마디그라(동성애자 축제)의 함성을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큰 파도에 이어 더 큰 것이 앞서간 것을 흔적 없이 지워버리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모두가 잠기고 모두가 떠나 버렸을 때, 루이 암스트롱의 동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암스트롱의 흐느끼는 듯한 ‘what a wonderful world’를 다시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동생이 있다는 말을 못 들었는데, 바하마에 두고 온 동생이 바로 리타였던가? 뒤늦게 언니를 따라나섰다가 길을 잃어 흰 구름 소 떼 한가로운 텍사스 휴스턴까지 오다니. 우주선 타고 달나라라도 가려고 했나? 리타 헤이워즈 같은 사랑의 여신이 될 수는 없다 해도, 죄 없는 소들에게 하얀 소금 풀을 뜯게 하다니.
45번 하이웨이를 가득 메운 소떼와도 같은 인간 행렬의 장관을 보았는가? 소 대신 차를 모는 현대의 카우보이들. 그런데 사람은 밥을 못 먹고 차는 기름을 못 먹고, 차도 인간도 허기가 지어 사막을 헤매다니.
다가오는 것의 무서움이여! 태풍에 쫓기는 인간들. 약속의 땅에서 기약도 없이 내몰리는 인간들, 아메리칸 드림이 뿌리 째 뽑히고 창문에 불이 꺼진 미국을 과연 어떻게 보면 좋은가?
노먼 메일러가 그랬던가? 미국은 원래 태풍 그 자체인데, 태풍의 눈 안에 살아서 세상이 조용한 줄만 안다고. 그렇다면, 이제 저들은 태풍의 눈 밖에 났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카트리나, 리타, 나비, 매미, 갈수록 태풍 가족은 늘어만 가니 어찌하면 좋은가? 아,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저 속에 태풍이 숨 쉬고 있다니, 저 아름다움이 눈물의 예고편일 줄이야.
최병현 호남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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