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의 물가안정목표를 낮춰야 한다는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저물가 구조가 고착화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정작 시중자금을 조여야 할 시점에 금리인상을 못하는 실기(失機)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물가안정이 최종 목표인 한은으로서는 물가안정목표에 비해 물가가 낮게 유지되면 금리인상의 명분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연구기관들이 주로 제기해 온 이런 논의는 최근 한은 내부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다. 한은이 27일 공개한 8월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에 따르면 한 금통위원은 “중국, 인도, 구소련 국가들의 세계경제체제 합류로 제품가격이 하락하면서 전 세계적인 물가안정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물가안정목표를 하향 조정하는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 21일 박승 한은 총재 주재로 열린 경제동향간담회에서도 일부 경제전문가들이 선진국 수준으로 물가목표를 낮춰야 한다고 제기했다.
현재 한은의 물가안정목표는 근원물가지수 기준으로 2003~2006년 2.5~3.5%이다. 3년 단위로 봐서 물가가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돈줄을 풀었다 조였다 하겠다는 것. 근원물가는 기후조건이나 국제정세에 따라 가격이 들쭉날쭉 하는 농축산물과 석유류를 뺀 물가지수이다.
8월 현재 근원물가는 전년동기대비 1.9%로 한은 물가목표치 아래에 있다. 3.5%가 넘으면 고물가라고 기준을 잡아 놓았는데, 실제 물가는 1%대까지 떨어진 것이다. 2000년 이후 근원물가가 목표치 위로 벗어난 것은 2001년(3.6%) 밖에 없다. 재정경제부가 “물가가 낮은데 웬 금리인상이냐”고 반대해도 한은의 대응 논리가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경제펀더멘털의 변화를 반영해 물가안정목표를 낮춰야 실효성 있는 금리정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중국과 인도가 값싼 제품을 쉴새 없이 생산해 우리 경제에도 저물가 구조가 내재화했다는 얘기다. 잠재성장률 하락도 반영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저성장은 대부분의 경우 저물가를 동반한다.
국민들이 제품을 사려는 수요 압력도, 기업들이 제품가격을 올리려는 의지도 약하기 때문이다. 연간 5% 성장기에 3.5% 물가는 국민들에게 안정수준일지 몰라도, 4% 성장기에는 고물가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가안정목표보다 낮은 물가가 장기화하면 국민들에게 인플레 기대심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당국의 금리인상이 없을 거고, 돈 값은 떨어질 거라는 기대에 부동산 투자만 부추길 소지도 많다. 박승 총재가 최근 낮은 물가에 대해 ‘위장된 물가’라고 밝혔지만, 이미 우리 경제에 ‘내장된 저물가’라고 판단하고 통화정책을 운용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한은으로서는 쉽게 결정할 처지가 아니다. 물가목표를 너무 깐깐하게 잡으면 목표를 맞추기 위해 금리정책이 무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회복으로 수요 압력이 조금만 높아져도 금리를 올려야 하고, 조금만 떨어져도 금리를 다시 내려야 하기 때문에 예측가능한 금리정책을 펴기가 힘들다는 것. 경기변동폭이 더 커질 수도 있다. 한은이 물가관리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도 더 높아지게 된다.
한은 관계자는 “현행 물가목표가 내년에 만료되고, 내년 말에는 새로운 중기 물가안정목표를 결정해야 한다”며 “그때까지 물가목표 하향과 목표대상을 근원물가에서 소비자물가로 대체하는 것 등 모든 문제를 논의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유병률 기자 bryu@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